반구대(盤龜臺)는 언양읍 대곡리의 사연호 끝머리에 층을 이룬 바위 모양이 마치 거북이 넙죽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반구산(265m)의 끝자락이 뻗어내려와 우뚝 멎은 곳에 테라스처럼 층층이 쌓인 점판암으로 형성된 기암절벽이 솟아있고, 돌틈새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와 그아래를 굽이쳐 흐르는 대곡천(大谷川)의 맑은 물이 절묘하게 뒤섞여 한폭의 진경산수화를 연출한다.

  고려말 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이 언양에 유배되었을 때 반구대를 자주 찾아 천혜의 절경을 즐기며 귀양살이의 괴로움을 달랬다 하여 ‘포은대(圃隱臺)’라 불리기도 한다. 반구대 인근에는 선사시대 우리 조상들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국보제285호 반구대암각화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있고, 약 1억년전에 형성된 공룡발자국과 신라화랑의 호연지기가 느껴지는 국보제147호 천전리각석이 산책로로 연계되어 역사체험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다.


설화/전설

▶ 치술신모와 망부석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 동쪽에 울산과 경주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765m의 치술령이 솟아 있다. 이 치술령 정상의 망부석에는 신라 충신 박제상과 그의 부인 김씨에 얽힌 충절과 정절의 사화가 전한다. 박제상은 눌지왕의 명을 받아 고구려에 가서 왕제 복호를 구출한 뒤, 다시 일본으로 건너거 볼모로 잡혀 있던 왕제 미사흔을 구출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계획이 탄로나 일본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끝내 신라의 신하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아 타국에서 죽음을 당한다. 박제상의 부인은 딸들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일본 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그 역시 죽고 말았다. 이후 부인 김씨는 치술신모가 되었다고 한다. 이 치술신모에 관한 설화에 덧붙여 울산에 구전되는 이야기가 있다. 박제상 부인의 몸은 돌로 변해 망부석이 되고, 영혼은 새가 되어 날아갔다고 한다. 이 새가 날아오른 자리를 비조(飛鳥)라 하여 두동면 만화리에 비조라는 마을 이름이 되고, 새가 숨은 바위는 은을암(隱乙岩), 그 곳에 지은 암자는 은을암(隱乙庵)이라 하였다. 바위 은을암으로 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인데, 박제상 유적지를 제대로 답사하려면 두동 치산서원에서 출발하여 치술령 망부석을 거친 뒤 은을암에 도착하는 것이 좋다.

여나산곡
   두동면에 있는 연화산(連花山)을 옛날에는 여나산(餘那山)이라 하였다. 고려시대에 어떤 서생(書生)이 여나산에 외롭게 살고 있었다. 그는 학업에 매진하여 마침내 과거에 급제했고, 좋은 집안의 규수를 배필로 맞아 들였다. 그는 벼슬길에 올라 과거의 장시(掌試)를 맡아 보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과거의 시험관인 장시가 되는 것이 큰 영광이었다. 과거가 끝나면 합격자들이 찾아와서 사배(射拜)의 예를 행하고 성대한 잔치를 마련할 정도였다. 여나산의 서생이었던 그에게도 합격자들이 찾아와 예외 없이 사배를 베풀었다. 이 때에 그 혼가에서는 기쁨에 넘쳐 노래를 지어 불렀다. 이 일이 있는 뒤부터 장시자(掌試者)를 위해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는 이 노래를 먼저 부르는 관례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 노래의 이름을 여나산곡(餘那山曲)이라 하였으나 가사와 곡은 전하지 않는다.

활천 박효자
   조선 영조 때에 두서면의 살그내(活川)에 박씨(朴氏)부부가 살고 있었다. 부부는 아침 일찍부터 일을 나가려던 참이었다. 효성이 지극한 부인은 시아버지를 위해 화로에 숯불을 피워 놓고, 윗목에 술상을 차려두었다. 박씨 부부의 갓난아이는 늙은 시아버지가 돌보았다. 그런데 노인은 며느리가 차려놓은 술을 마시다가 그만 취해서 잠이 들었다. 그 사이에 손자는 화로에 엎어진 채 숨을 거두었다. 노인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거리는 사이에 며느리가 돌아왔다. 노인은 엉겁결에 자는 척 드러누웠다. 방문을 열고 비참한 상황을 목격한 부인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러나 부인은 ‘잠을 깬 시아버님이 행여나 이 광경을 보신다면 얼마나 자책하실까?’ 싶은 마음에 죽은 아이를 뒷산에 고이 묻어 주었다. 노인의 심정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며느리에게 아기는 어딜 갔느냐고 물었으나 며느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이웃 아이들이 업고 놀러 나갔다고 대답했다. 얼마 뒤에 돌아온 남편을 밖으로 불러낸 부인은 사건의 전말을 전하며, “아기는 또 낳을 수 있지만, 이 일로 인해 아버님의 신상에 변고라도 생기면 큰일”이라며 시아버지를 걱정하는 것이었다. 효심에 감탄한 남편은 그 후로 날마다 아내에게 큰 절을 하였고, 이를 두고 팔불출 남편이라는 소문이 마을에 퍼졌다. 때마침 영남으로 암행하던 어사(御史)박문수에게 그 소문이 들려왔다. 살그내(活川)에 찾아와 박씨의 속사정을 듣게 된 박문수는 조정에 이 일을 보고하였다. 곧 이어 나라에서 큰 상이 내려졌으며, 충효비도 세워 그 정신을 기리도록 하였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비는 사라지고, 단지 이야기만 전해올 뿐이다.

Posted by 울산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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