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울산 민족예술인 총연합에서 기획한 제11회 울산시민과 함께하는 예술여행 중 네 번째 시간인 <울산의 독립운동사> 현장 답사에 참가했습니다.

 

답사는 11월 16일이지만 선착순 20명이 지난 10월에 이미 마감되어 자리가 없어서 혼자 제 차로 이동하면서 어렵게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이현호 강사님과 참석한 시민들과 함께 동구 일산과 방어진 일대의 독립운동의 길을 더듬어 갔습니다.

 

 

*보성학교

먼저 일산행정복지센터를 조금 지나 보성학교 터로 갔습니다. 사립 보성학교는 1909년 일산에 세워졌으나 일제의 탄압과 재정 문제로 1912년경에 폐교되고 말았습니다. 3.1 운동 직후에는 성세빈, 김천해를 중심으로 노동야학이 만들고 이를 이어받아 1922년에 보성학교가 부활되었습니다. 폐교될 때까지 총 21회 499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습니다. 지역민과 그들 자녀에게 근대교육과 함께 항일정신을 심어주는 역할도 하였습니다. 동구지역 항일운동의 구심점이 되자 일제는 마침내 1929년 학교 폐쇄명령을 내렸습니다. 성세빈 교장을 비롯해 일제가 사상이 불온하다고 지목한 교직원들이 모두 사퇴함으로써 사태를 수습하게 됩니다.

 

 

3.1 운 이후 문화운동 차원으로 전국 각지에서 청년 운동이 활발히 펼쳐졌습니다. 민중들에게 시대적 흐름을 알림과 동시에 민족 단결을 추진해 나갔습니다. 동구 지역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던 동면 청년회는 보성학교 교원들이나 관련 인물들이 간부를 맡았으며 사무실도 학교 안에 있었다고 합니다. 손자인 성낙진 어르신의 말씀으로는 1938년 별세했을 때 몽양 여운형이 직접 내려왔을 만큼 민족지도자로서 명성이 높았다고 합니다.

 

 

성세빈(1893~1938)은 누구인가? 일산에서 태어나 청년시절 노동야학을 3년간 운영하다가 1922년 보성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1924년 신간회 울산지회에서 거행한 설립 1주년 기념사업에서 민간 교육공로자로 표창을 받았습니다. 그의 희생과 봉사정신을 기념하여 학부형과 지방 유지들이 뜻을 모아 거행했습니다. 동창회에서 1940년대에 성금을 모아 성세빈의 송덕비를 건립했습니다. 현재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부끄럽게도 일산 해수욕장을 가면서도 이 비석 존재를 몰랐습니다.

 

 

현재 성세빈 선생 송덕비가 있는 곳에 운동장이 있었으며, 비석에서 안쪽으로 20m 떨어진 곳에 학교 건물이 있었습니다. 성세빈 생가에도 가 보았습니다. 입구에 팻말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으나 근처에 공사 중이라 나중에는 찾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마당에는 항아리가 굉장히 많고 집안에는 성세빈 선생의 사진과 유품들이 있었습니다.

 

 

 

*서진문 묘소

서진문(1900~1928)은 일산에서 태어나 사립일신학교(현 병영초)에 입학, 사립 개운 학교(현 남목초)로 전학하여 졸업하였습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23년 동경대지진 때 일본인들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고 그대로 귀국하여 보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여자 야학을 개설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을 왕래하면서 조선인 노동자를 위한 활동 하다가 체포되어 고문 끝에 출옥 직후 29세로 사망하였습니다. 일본에서 재일 본조선 노동조합장이 치러졌으며 울산에서 동면 면민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성세빈이 직접 쓴 비석을 안고 장례 행렬에 앞장섰으며 수많은 인파가 그 뒤를 따랐다는 당시의 사진이 있습니다. 현재 동구 화정도 화정공원에 안치되었으며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 되었습니다. 입구에 동상의 모습은 아주 귀공자처럼 생겼습니다. 이날이 서진문 91주기로 오후에 행사가 있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방어진초등학교

방어진초등학교의 전신은 1910년 방어진 일본인회에서 설립한 방어진소학교입니다. 1912년 방어진 공립 심상소학교로 개명하고 주로 일본인 학생들이 다녔습니다. 1945년 광복한 후에도 본국으로 귀국한 일본인들이 '방어진회'를 결성했습니다. 나카베 이쿠지로라는 사람의 공적비가 당시 교정에는 세워졌습니다.

 

 

당시 방어진초등학교

* 방어진 주재소 터

중진 1길 방어동 300번지에 있는 방어진 주재소는 1911년 5월에 설치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상해와 도박, 어업령 위반자로 인해 울산경찰서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항상 유치장이 만원이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탄압과 억압의 공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광복 후 파출소로 바뀌고 계속 증축, 개축하여 2011년 철거되고 현재는 다세대 주택 건물이 들어섰습니다. 주재소 옆에 있는 당산나무와 마을 제당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옛 주제소 터
옛 청루 골목

*방어진 일본인 거리(히나세 골목)

주재소에서 바닷가 쪽으로 빠져나가는 중긴 1길이 방어진의 중심 상가로 불리던 히나세 골목입니다. 이 골목에는 울산 최초의 목욕탕인 히나세탕이 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자리 잡은 이 목욕탕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장수탕으로 영업 중입니다. 일본인 어부와 청루 골목 여인들이 단골이고 앞길은 당시 방어진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입니다. 일제 때의 건물들이 약간 남아 있습니다.

 

 

*방어진 철공 조선소 터

1930년대 방어진 사회에 많은 영향을 준 방어진 철공 조선소는 1929년 자본금 10만 엔으로 설립되었습니다. 방철 설립 후 어항 축조공사(방어진 방파제)의 준공 영향이 컸습니다. 이 회사는 나카베 일족이 세운 것인데 당시로서는 최첨단 시설을 갖춘 근대식 조선소입니다. 방철은 조선소와 철공소로 나누었는데 조선소에는 목조 어선의 수리 및 건조를 하고 한국인이 많았답니다. 철골 소에서는 어선 장착용 엔진을 제작하는데 일본인들이 많았습니다. 현재는 모두 철거된 상태입니다.

 

 

옛 히나세 골목으로 현재 남아있는 일본식 건물의 흔적

 

*방어진 방파제

방어진 최초의 방파제는 1910년 10월 방어진일본인회장 코오다 에이키치의 주도하여 총공사비 6천 원을 들여 준공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고등어가 많이 잡히면서 어선들이 크게 늘어나자 더욱 큰 방파제가 필요했습니다. 1928년 3월 방어진 축항 준공식이 열리고 기념우표를 발행할 만큼 원산 이남 동해안 제일 어항으로 홍보되었답니다. 방파제 입구에는 축조 준공비를 세웠는데 삼발이에 묻혀 있다가 2009년 다시 세워졌습니다. 수많은 개축과 태풍으로 파괴되기도 하면서 옛 모습 그대로 현재 남아있습니다.

 

 

방파제 끝에서 보이는 슬도 등대와 그 주변

 

방파제에서 보이는 방어진항 모습

*마지막 일정

울산시민과 함께하는 예술여행 ‘공감’은 마지막 강의가 남아있습니다. 11월 26일 화요일 저녁 7시에 울산시청자미디어센터 다목적 홀 3층에서 허영란 강사의 ‘예술과 예술 아닌 것 사이’가 있습니다. 강향경의 가야금 초청공연도 있습니다.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옛 방어진 지도

 

 

 

*보성학교 오는 길 - 동구 일산진 11길

 

 

 

 

 

 

Posted by 여행보내주는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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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불매운동가 2019.11.26 12: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평소에 알기어려운 정보들이네요~ 감사합니다~!

  2. 이시국 2019.11.26 12: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어진에 대해서 알기 좋게 설명하셔서 보기 편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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