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이 올해로 573돌을 맞이하였습니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한글 창제에 대한 영화도 있고 외솔 기념관, 외솔 뮤지컬 등 한글과 관련된 많은 행사가 있습니다. 저는 울산 야학의 역사를 알아보기 위해 울산 노동 역사관을 방문했습니다. 야학 정신을 후세에 기리기 위해 QR코드 현판을 설치하고 울산 야학과 관련한 내용을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민족 스스로 힘을 얻기 위해 울산에서도 활발하게 펼쳐졌던 민중 교육인 울산 야학(夜學)을 재조명했습니다.

 

 

야학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 공부한다고 붙여진 이름입니다. 정식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빈곤층에 있는 학생들이 야간에 모여 공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애국계몽운동이 전국으로 퍼지면서 울산도 야학이 시작됐습니다. 식민교육 대신 민족정신교육을 위해 시작되어 꽃을 피우며 확대된 것은 1920년대부터입니다. 그 이유는 사립학교에 대한 탄압이 커지고 서당도 함께 쇠퇴하면서 대중화된 민족교육 방안이었습니다. 3·1 운동 이후 분출된 민중의 힘을 결집해 자주독립을 이루겠다는 독립운동가와 지식인들의 교육열기도 있었습니다. 식민지 시대에 스스로 깨우쳐 힘을 낼 수 있다는 주체의 욕구가 커졌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 동구지역에 항일운동의 요람이 된 보성학교가 있습니다. 보성학교 설립자 성세빈 선생은 3.1 만세 운동 1년 뒤인 1920년 동구 일산동에 보성학교의 전신인 노동 약학을 설립했습니다. 교육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민중이 깨쳐야 한다며 시작된 울산의 야학은 3.1 운동 이후 들불처럼 번져 청년회나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1920년대 후반에는 100개가 넘었습니다.

 

야학에서 교육은 주로 조선어 수업을 했고 민족의식을 높이는 역사, 산술, 한문도 가르쳤습니다. 일본어 하는 곳도 있지만 아예 일본어를 가르치지 않은 곳이 많았습니다. 조선어 말살정책에 불구하고 민중교육기관으로 조선어를 보급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게 위한 것이었다. 보통학교에선 일본어를 국어로 칭했지만 야학에서는 일본어로 정확히 명칭 했습니다.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교육운동을 전개합니다. 민족 교육 기관은 사립학교, 종교 계통의 학교, 개량 서당, 강습소, 야학 등이 있었습니다.

 

 

야학은 노동야학이 중심이 됐으나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일반야학 뿐 아니라 농민 야학, 청년 야학, 부인 야학, 여자 야학 등도 함께 만들어졌습니다. 야학을 주도한 것은 청년회였습니다. 언양 등 지역 청년회가 강한 곳은 한꺼번에 여러 대상을 달리해 야학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청년회는 3·1 운동 이후 울산 36곳에 만들어진 야학을 통한 민족계몽, 민중계몽에 나섰습니다. 그 외 농민단체와 불교와 천도교회 등도 야학을 운영했습니다.

 

이런 상황으로 울산에서는 1929년부터 일제의 야학 탄압이 본격화 됐습니다. 신간회가 1929년 2월 18일 울산 노동야학 연합회 창립대회를 개최하려고 하자 일제는 이를 불허했습니다. 총독부의 교육방침에 위배된다는 것과 집회가 불온하다는 이유였습니다. 같은 해 8월에는 병영 노동야학을 금지시켰습니다. 불온한 강사가 있어 어린 아동들에게 사상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1929년 동면 보성학교에 대한 폐쇄 명령과 1931년에는 언양 농민조합이 운영한 농민 야학에 폐쇄명령을 내려졌습니다.

 

◯ 1929년 2월 19일 일제경찰 울산 노동야학 연합회 창립대회 금지

◯ 1929년 9월 병영노동야학 폐쇄 / 1931년 7월 병영 야학도 폐쇄

◯ 1931년 10월 25일 언양농민조합 운영 언양 농민 야학 폐쇄명령(울산경찰서)

◯ 1931년 11월 20일 읍내노동야학 공부 격려 연설한 3명의 청년 체포

 

 

울산의 항일운동 거점 역할을 했던 중구 북정동의 삼일 회관이 있습니다. 신간회가 1929년 2월 울산 노동야학 연합회를 창립하면서 울산 야학운동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배우고, 더 가르치고,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민족교육, 민중교육이 야학입니다. 1930년대 말까지 일제의 탄압을 견디며 끈질기게 계속됐습니다. 1929년 100여 곳에 달했던 야학은 1937년에 이르러 20여 곳으로 크게 줄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울산야학의 특징은 여자 야학과 부인 야학 등 여성 야학 비중이 높았습니다. 그리고 청년회에서 주도하여 민족계몽, 민중계몽에 나섰고 교사들은 대부분 20대로 청년회 활동과 함께 했습니다. 또 울산 야학은 독자적으로 설립됐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야학들을 묶은 연합을 만들었습니다. 울산 야학은 무산 아동과 여성을 포함해 민족혼과 의식을 일깨우는 참 교육기관이었습니다. 공립학교에 다닐 수 없이 가난했던 아이 한 명이라도 더 가르치려고 애썼던 민중교육기관이었습니다.

 

 

여성 독립 운동가들이 한 눈에 잘 정리되어 있어요.

우리말을 어떻게 지켜내고 오늘에 이르렀는지 아이들에게 알려 주고 싶습니다. 또 지금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우리말 교육을 해야 되는지 생각해 보게 합니다. 일제 탄압에도 스스로 힘을 얻기 위해 배움의 공간을 만들었던 야학운동. 그 징표가 100년 전 울산에도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변 국가들에 의해 늘 피해를 보고 휘둘립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학생들이 공부를 너무 소홀히 생각하는 요즘 안창호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 죽고 살고 노예 되고 독립됨이 판정되는 것은 智力과 金力이요,

우리는 아무리 하여도 이 약속을 벗어나지 못하오.

우리 청년이 하루 동안 학업을 폐하면 그만큼 국가에 해가 되는 것이오!

 

-안창호 「우리 국민이 단정코 실행할 6大事」 중 (독립신문 1920.1.10.)-

야학 전시가 끝나도 노동 역사관을 가보세요. 노동 역사관은 1987년 노동자들의 삶, 투쟁, 문화를 아우르는 공간이자 미래 세대에게 노동의 가치를 체험할 수 있게 하는 전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노동 중심 역사관입니다. 현대자동차 노사가 사회 공헌 차원에서 기부 채납 한 오토밸리 복지 센터 4층에 울산 북구와 노동 시민 단체들이 역사관 건립에 뜻을 모아 2014년 3월 울산 노동 역사관 1987이 개관됐습니다.

 

 

내부에는 중공업, 자동차, 병원 노동자들의 작업복 120벌로 만든 설치 미술과 백무산의 시 「전진하는 노동 전사」가 새겨지고 노동 대투쟁 당시의 사진이 배경으로 있는 현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노동 역사와 관련하여 자료실 1에는 도서, 잡지, 미디어 자료실이 있으며 자료실 2에는 문서와 물품 관련 자료가 비치되어 있습니다.

 

 

노동 역사관에는 일제강점기 울산의 노동자, 광복 전후 울산의 노동조합,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울산과 전국, 노동 역사 연표, 1987년 이후 노동 역사의 변화, 노동 역사 물품이라는 주제로 상설 전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작지만 각종 소장 자료가 10만 점에 이르며 근현대 역사 속 노동을 드러내는 집약 공간으로 가치가 있습니다. 물품이 아닌 생산물을 만드는 주인공인 노동과 노동자를 드러낸 박물관은 최초입니다. 울산의 산업화 역사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 상설 전시 : 매주 화~일 오전 9시~오후 6시   

       * 매주 월요일과 법정 공휴일은 휴관.

       * 단체 및 개별 관람을 사전에 예약하면 전체 안내 등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 주소 : 울산시 북구 산업로 1020 오토밸리 복지센터 4층

  - 문의 : 052- 283-1987

 

 

 

 

Posted by 여행보내주는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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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최서빈 2019.10.12 09: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야학의 역사가 울산에 있었는데도
    미처 몰랐습니다
    배움에서 역사가 묻어 있었네요
    노동 역사관도 꼭 가 봐야 겠습니다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2. 황련산지기 2019.10.12 10: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울산에 노동역사관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네요.^^~~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3. 태풍조심 2019.10.12 10: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축제 기사가 너무 넘치는데 의미 있는 기사를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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