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 1 운동 100주년이 되면서 많은 행사가 있었습니다. 행사장에서 들었던 독립운동가의 마을, 범서 입암리를 찾았습니다. 덜 알려진 독립운동가로 호명하신 이관술 선생도 입암마을 사람입니다. 입암리는 태화강 상류 범서읍에 있는 선바위만 알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울산박물관 <근현대사를 품은 마을 기행>으로 인솔자 배문석 님과 회원들이 구석구석 돌았습니다.

 

 

예로부터 입암(선바위)은 울산을 대표하는 명승지입니다. 고지도마다 빠지지 않고 그림이나 글씨로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입암은 범서읍에 속한 입암리를 뜻하며 마을 이름 자체가 ‘선바위’를 한자로 적은 것입니다. 밤사이 비로 날씨 걱정을 했는데 밝고 맑은 햇살을 받으며 마을길을 누볐습니다.

 

 

손후익,손응교 집터

감나무와 곰솔이 많은 입암리는 밖에서 보기와 달리 조용하고 넓은 평지를 가진 곳입니다. 조선 중엽부터 학성이씨 집성촌으로 지금도 다수가 그렇습니다. 일제강점기 입암리에 가산 이우락 선생이 유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인 1919년 <파리 장서>에 참여하였습니다. 1925년 <2차 유림단사건> 때 독립운동 군자금 모집 중 붙잡혀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에 정부에서 96년에 군국 포장을 추서 하였습니다. ‘파리 장서’는 3․ 1 운동에 참여하지 못했던 전국의 유림이 서구 열강이 주도한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선언을 담은 편지를 보낸 것을 말합니다.

 

 

이관술 생가

같은 한주학파인 손후익 선생이 입암리에 이주해 왔습니다. 아버지 손진수 님 등과 같이 1925년 2차 유림단 사건(항일 의열 항쟁과 군자금 모금 등)에 참가하였습니다. 의열단 김원봉 등과 교섭하여 무기를 입수, 암살 등을 계획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옥고를 겪었습니다. 손후익 선생의 동생인 손학인 선생은 언양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 운동가들과 뜻을 같이해 방어진에서 격문을 뿌리고 반제동맹과 건국동맹 등의 활동을 꾸준하게 펼쳤습니다. 항일 학생운동에도 관여하다 옥고를 치렀습니다. 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습니다.

 

 

뒤늦게 주목을 받는 손응교 선생이 있습니다. 혁신 유림 독립운동의 거두였던 심산 김창숙 선생의 며느리로 잘 알려졌습니다. 독립운동가의 딸, 며느리, 그리고 아내로 불렸지만, 개인의 한 사람의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큽니다. 아버지 손후익, 할아버지 손진인(손진수), 종조부 손진형, 삼촌 손학익, 이모부 정을기, 정수기, 시아버지 김창숙, 남편 김찬기 모두 독립운동 국가유공자입니다.

 

 

울산 박물관 여성독립운동가 초상화 전시에 있던 손응교 선생 초상화

 

 

 

심산 김창숙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유림 대표로 독립운동을 주관하였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부의장으로 활동했습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남조선 대한 국민대표 민주의원 의원을 역임, 유도회 회장 겸 성균관(成均館) 관장을 역임하였고 성균관대학교를 창립하여, 초대 학장에 취임하신 분입니다.

 

 

 

 

 

 

일제강점기 후반부터 해방 직후까지 명성이 높았던 독립 운동가로는 학암 이관술 선생이 있습니다. 일본으로 유학해 1929년 3월 동경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4월 동덕여자고등 보통학교 교사가 되었습니다. 1931년 학생자치 및 교내 경찰 출입 반대 등을 내건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엄호했습니다. 1932년 10월 재학생과 졸업생으로 구성된 독서회를 지도했으며, 11월 ‘반제동맹 경성지방결성 준비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1933년 1월 ‘경성 반제동맹 사건’으로 검거되었고, 1934년 3월 31일 병보석으로 가출옥, 12개월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리고 <경성트로이카>와 적색노조 사건으로 1941년 검거당해 수감되었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 박헌영을 중심으로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중앙위원 및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으로 활동했습니다. 1946년 2월 민족 통일전선 조직인 민주주의 민족전선 중앙위원이 되었습니다. 그해 7월 6일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으로 미군정 경찰에 검거되어, 11월 28일 무기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수감 중이던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 인민 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대전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위법하게 처형당했습니다.

 

 

이관술 선생의 유족들이 ‘애국지사 학암 이관술 유적비’기념비를 선바위 휴게소에 세웠습니다. 다수 보수단체의 항의로 그 비석은 생가 앞 밭 한가운데 깊이 묻어져 있습니다. 선바위 휴게소 나무 그늘 밑 비석이 서 있던 자리는 잡초만 무성한 채 테두리 돌만 남겨져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들은 항일 독립운동에 있어 사회주의를 구별해서 나쁘다고 인식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3․ 1 운동 전후 유학생과 해외 독립 운동가 중심으로 사회주의 독립 운동가들이 등장한 후 가장 빠르게 늘어났습니다. 일제강점기 후반에 이르면 변절하지 않은 국내 독립운동가 다수가 사회주의 계열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노래도 듣고 조금 쉬었다 돌다리를 건너 태화강 생태관 앞으로 지나가니 선바위가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암자 맞은편에 용암정이라는 정자가 있습니다. 구강서원장을 지냈으며 학성지를 편찬하고 울산의 사림을 주도하신 이원담(송 옹) 선생을 위해 지은 것으로 학성 이 씨 집안의 소유입니다. 평소에는 문이 닫혀있으나 인솔자 선생님 요청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입암정이었으나 이름이 바뀌었고 손후익 선생의 용암 정기에 있는 내용입니다. 정말 경치가 좋은 곳에 있습니다.

 

 

이 정자는 백룡담 위에 있다. 입암의 제현(諸賢)들이 그의 선조인 송 옹(1683~1762)을 위해 고종 20년에 지은 것이다. 국수봉의 한 지맥이 서로 이어져 동으로 뻗어 나가다가 홀연히 서쪽으로 굽어서 용담에 멈추었다. 문수(文殊)와 연화(蓮花)와 무학(舞鶴)이 다 일어나 마치 손을 모아 읍을 하는 듯하다. 물은 언양으로부터 내리는 것이 사연에서 반구의 물과 다시 망성의 물과 만나 용담으로 직입하는데 우뚝 솟은 바위가 있어 정자와 접할 듯하고, 그 사이로 거룻배가 겨우 통할만 한대, 물결이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가 방숙(方叔)의 북소리요, 사양(師讓)의 경쇠 소리더라. 이곳은 산수 간에 제일이라……. (중략)

 

 

 

이관술 선생과 어머니가 다른 누이 이순금 선생이 있습니다. 1930년대 학생 만세운동과 적색노조를 중심으로 항일에 앞장서서 일제 감시 인물 카드가 여성 중 가장 많듯이 일제강점기 후반 가장 주목받는 여성 독립 운동가이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이념 갈등 냉전 시대를 맞게 됐고 월북을 한 후 북에서 여성 고위직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독립운동가 서훈 기준에 맞추면 국가 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울산 박물관 여성독립 운동가 초상화 전시에 있던 이순금 초상화

선바위 뒤편에는 작은 무덤이 있는데 어머니 김남이 묘입니다. 장사해서 이관술 선생의 아버지 이종락 씨를 크게 도와주었고 각별한 애정이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사망한 그녀를 울산까지 운구해 묘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여성들이 족보에도 이름을 남기지 못했던 시절에 당당하게 ‘김남이지묘’라고 비석까지 있습니다. 진달래꽃이 핀 선바위가 보이는데 너무 아름답습니다.

 

 

 

김남이 묘소

이관술 선생의 생가를 중심으로 역사기행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아울러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이 미군정기에 조작됐다는 학술발표(임성옥 박사논문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고)후 단행본이 출간됐습니다. 그리고 이관술의 독립운동을 재조명하고자는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최근에 ‘학암 이관술 기념사업회’가 구성되어 독립유공자 신청, 유적비 복원, 기념관 조성, 선바위 일대 독립운동마을 조성, 평전 발간, 입암마을 독립운동마을 공로비 및 안내판 제작, 추모 행사 등을 계획하고 있답니다. 이관술 선생의 유족을 비롯해 우리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본부, 울산노동역사관, 민족문제연구소 울산지부, 변호사, 고교 교사, 작가, 입암리 주민 등이 많은 분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입암리는 적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지만 유림부터 사회주의 계열까지 서로 결이 다른 독립운동가가 함께 배출된 곳입니다.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에서 이들은 변절하지 않는 마음과 행동을 제일 중요한 덕목이었을 것입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은 시대에 온 일가가, 온 마을이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헌신과 투쟁을 했습니다. 유족들뿐만 아니라 입암리 주민 전체 명예가 회복되고 울산의 현대사를 돌아보고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Posted by 여행보내주는여자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아디다 2019.06.17 23: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관술 선생이 울산분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임압분이라는 사실에 친근감을 느꼈고...이러한 역사 재조명이 참 귀하다는 걸 느낌니다^^ 감사하다는 말씀드리고 싶네요!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