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좋아하는 울산 소년 상경해

기어코 이루어낸 가수의 꿈으로

타향살이, 짝사랑, 이원애곡 등 

고단한 국민들 노래로 위무하다.

 

 

문화의 거리 초입에 있는 작품, 꿈의 정원

십대 후반의 나이에 가수의 길에 들어서서 한국 최고의 여가수가 되었던 분이 TV에 나와서 자전적인 고백을 하는 프로그램을 시청했습니다. 그 여가수는 일본에 가서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 일본에서도 유명한 가수가 되었습니다. 그 후 말 못할 어려운 사정을 겪고 한국에 다시 돌아왔을 때 두 손에 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아모르파티’라는 노래가 우연히 흥행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문화의 거리 안내표지판

그 여가수 순회콘서트에 찾아왔던 어떤 암환자는 “노래를 들으면서 모든 병이 나은 거 같다”는 고백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오랜 세월 무명으로 어렵게 지내다가 ‘백세인생’이란 노래가 히트치는 덕분에 곳곳에서 출연 요청이 이어져 왕성하게 활동하게 된 분의 사연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꽃이 없는 인생을 상상할 수 없듯이 음악이 없는 인생 또한 상상할 수 없습니다.

 

 

고복수길에 있는 고복수 스타 인증 별 표식과 고복수 황금심 부부

음악이란 듣는 사람들이 발 딛고 있는 현장을 배제하고서는 공허한 종소리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유행가라는 것은 그 시대의 당사자들이 공감하는 가사와 멜로디가 담겨집니다. 일제강점기와 현대사에서 대중가수로서 사람들의 삶을 대변하는 노래로 심금을 울리고 유명세를 떨쳤던 울산 출신 가수가 있습니다. 오늘 포스팅으로 울산 중구 병영에서 태어난 고복수(高福壽) 선생에 대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고복수 길의 고복수 연표와 기타를 퉁기는 가인 고복수

때마침 지난해 12월 24일 중구 원도심에 그를 기념하는 음악 살롱이 문을 열었습니다. 그곳에서 어느 날 혜성 같이 나타나 시대의 희로애락을 담아낸 노래로 인기를 끌었던 고복수 선생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한국가요의 산 증인이 된 고복수 선생은 1911년 울산 병영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선생은 축음기가 있는 곳이면 달려가 노래를 들을 만큼 열정이 많았습니다. 또 교회합창단에 들어가 선교사로부터 드럼과 클라리넷 등 각종 악기를 습득했고, 뒷동산에 올라가 날이 저물도록 노래를 불렀습니다.

 

 

고복수 음악살롱과 살롱카페
고복수 흉상

소년 고복수는 18세의 나이에 울산과 부산의 가요 콩쿠르에 입선했지만 서울에 가서 꿈을 펼치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선생은 부친이 잠든 틈을 타 장롱에서 60원을 꺼내들고 무작정 상경했습니다. 그리고 1933년 22세 때 콜럼비아 레코드사가 주최한 대회에서 3등을 하고 가수의 발판을 다지게 되었습니다.

 

 

가수를 꿈꾸었던 청춘 고복수
고복수와 황금심의 운명은 가수였고, 부부였다.

콜럼비아 레코드사가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사이 작곡가 손목인 선생이 그를 오케레코드사로 옮겨주었는데 당시 이철 오케레코드사 사장은 전속 축하금으로 2,000원을 지급했다고 합니다. 당시 소학교 교사 한 달 월급이 40원이었으니 꽤 큰 돈이었고, 그만큼 고복수의 가능성을 짐작케 하는 대목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첫 만남

이후 1934년 손목인 작곡의 ‘타향살이’와 ‘사막의 한’을 불러 인기가수가 되었고, ‘짝사랑’ ‘휘파람’ ‘이원애곡(梨園哀曲)’ ‘풍년송(豊年頌)’ 등을 쏟아내며 최고의 가수로 입지를 다졌습니다. 그의 아내 황금심(黃琴心)은 고복수의 팬이었던 언니의 손에 이끌려 10대 초반에 선생의 무대공연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한순간 고복수의 노래에 매료돼 집으로 돌아와 축음기에 매달려 주야장천 노래만 불렀습니다.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황금심은 기어코 오케레코드사의 노래 시험에 통과해 데뷔하게 되었는데 그 면접 자리에 고복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속사가 달라 두 사람은 서로 만나지 못했는데 나중에 고복수가 빅타 회사의 반도악극좌로 소속사를 옮겼고, 「옥중 춘향전」에서 고복수가 이몽룡을, 황금심이 성춘향 역을 맡으며 사랑을 키워갔습니다. 고복수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황금심도 알았지만 하늘같은 대선배를 자신의 짝으로 생각할 수는 없었습니다.

더구나 자신과는 10살이라는 나이차이도 있었기에 처음에는 가족들의 반대도 심했습니다. 친일단체였던 조선연예협회는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고복수를 ‘연예인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명목으로 제명하려했고, 고복수는 일본으로 잠시 피신을 했습니다. 그 사이 황금심이 아이를 낳았고, 그래서 양가부모님들도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해주었습니다. 마침내 1941년 두 사람은 결혼했고, 따로 부르던 노래를 같이 듀엣으로 합창하게 되었습니다.

 

 

일제의 압박으로 만주로 피난가기도 했고, 동포들을 위한 위문공연도 많이 다녔다.

선생은 일본과 만주 등지에서도 활동했는데 고복수 선생이 만주 하얼빈이나 용정 북간도에서 타향살이를 불렀을 때 동포들은 너나할 것 없이 눈물의 대성통곡을 이루었습니다. 나라 잃은 설움으로 타국을 떠도는 동포들과 이심전심 혼연일체가 된 것이지요.

 

 

6.25 전쟁은 참혹한 동족상잔이었다.

1950년 6.25전쟁 때 김일성의 “고복수를 체포해 북으로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은 계수남은 가극 동맹이라는 좌익예술단체의 중책을 맡고 있었습니다. 계수남에게 붙잡혀 의용군에 강제 입대하게 된 부부는 남동생과 함께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고복수가 “임신한 아내는 보내달라”는 말을 했고, 황금심은 떡장수로 변신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형이 조국을 등지고 북한에 끌려가는 것을 견디지 못한 남동생은 원산 근처에서 형을 살리려고 형을 웅덩이에 밀쳤습니다. 겨우 탈출한 고복수는 국군을 만나게 되었고, 국군이 암호를 대라고 하자 “타향살이”라고 대답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고복수는 육군정훈공작대에 자원해 군위문연예대에서 활약하였습니다.

 

 

고복수와 황금심의 앨범 표지

고복수는 1957년 8월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가수생활 25년을 결산하는 은퇴공연을 가졌고, 1959년 동화백화점 5층에 동화예술학원을 개설해 우리나라 최초의 가요학원을 경영하면서 이미자, 안정애 등의 인기가수를 배출하였습니다. 1959년 「타향살이」라는 영화를 제작했는데 흥행에 실패하여 생활고와 병고에 시달리다가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동시대에 활약했던 가수들의 앨범

굴곡진 현대사를 온몸으로 관통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인(歌人)은 그렇게 쓸쓸히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만 울산 원도심에는 그를 기리는 <고복수 음악 살롱>이 개관해 항상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편 인터넷에 떠도는 내용중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워져 서적외판원으로 활동했다는 부분은 사실이 아닙니다. 잘 아는 동생이 서적외판원으로 힘들어하자 그를 도와주기 위한 방편으로 사람들을 소개해주고 도움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들이 직접 밝힌 내용이기에 확실한 팩트입니다.

 

 

고복수 음악살롱 2층의 살롱카페 내부 모습

서두에 언급했던 아모르파티의 뜻은 운명애(運命愛)라고 합니다. 그의 증명이듯 백년인생을 살면서 고향과 가족과 조국을 운명처럼 사랑했던 고복수 선생. 그는 가수로, PD로, 영화제작자로 굵직한 삶을 살았기에 그의 인생은 영화보다 진한 감동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전담 해설사가 친절한 안내로 세세하게 설명해준다.

 

 

 

 

Posted by 박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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