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현재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9년 그날의 함성을 기억합니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그러나 일본수비대의 총칼 앞에 우리 선조들은 피를 흘리고 쓰러지고 맙니다.

 

 

울산 병영초등학교 입구 외솔기념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삼일사로 걸어가 봅니다.

삼일사로 오시는 방법은 대중교통으로 912번, 942번 시내버스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병영초등학교와 유치원이 있는 도로 횡단보도에는 어린이가 교통안전 깃발을 들고 서 있는 조형물이 보입니다.  그 위로 태극기가 도로의 가로등마다 게양된 것을 보니 이곳은 삼일 독립운동의 그 열기와 정신이 아직도 살아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어 비탈길을 오르면 삼일사라는 사당이 나타납니다.

삼일사는 울산 병영 독립만세운동을 하다 일제의 총탄에 순국한 김응룡, 문성초, 엄준, 주사문 4명의 열사와 옥고를 치른 권석운, 김송근, 김장수 등 22명 열사의 위패와 영정, 국가가 준 훈장 등을 모신 사당입니다.

 

병영 삼일 충혼비

외솔 최현배 선생이 1967년 선조의 혼을 기리기 위해 직접 지은 시를 조각해 놓은 비문이 있습니다.

 

 

병영은 본래 경상도 좌 병마절도 영이 설치된 곳의 준말로 군사 주둔지였습니다.

조선 세종 19년(1437년) 왜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붙인 지명으로서 이곳 주민들은 이 때문에 역사적으로

유달리 호국정신이 강한 편입니다.

 

 

기미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운동은 그 당시 서울에서 유학 중이던 울산 병영 출신 한명조,

이영호 등이 목격한 후 고향으로 내려옵니다.  고향으로 온 이들은 병영청년회에 3·1운동 사실을 알리고, 청년들에게 우리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을 해야 한다며 호소합니다.

 

 

이를 전해 들은 병영청년회 간부였던 양석룡, 이현우, 이종욱, 이문조, 박영하, 김장수, 이종근 등은 거사를

위한 모의를 거듭한 끝에 4월 5일과 6일의 양일에 걸쳐 성내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합니다.

병영 삼일만세운동은 야학을 열어 교육 및 봉사활동을 전개하던 병영지역의 기미 청년조직인 병영청년회

의 주도로 이루어졌습니다.

 

 

앞서 언양 시장터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지자 일제는 4월 5일에 열릴 울산시장을 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청년들은 뜻을 모아서 1919년 4월 4일을 거사 일로 잡고, 만세운동을 약속하는 뜻으로 오른손 가운

데 있는 손가락을 깨물어 결사 진충보국이라고 서명했습니다.

 

 

병영청년회원들은 4월 4일 일신 학교 지금의 병영초등학교 교정에서 축구 경기를 가장하여 모인 이들은

축구공을 차올리는 것을 신호로 일제히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학생들과 함

께 마을을 돌면서 만세 시위를 하였습니다. 이들은 일본수비대의 무력진압으로 해산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틑날인 4월 5일 일신 학교 근처에서 대한 독립 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들고 다시 한번 만세운동

을 감행합니다. 결국 4월 4일과 5일 이틀에 걸쳐 만세운동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 일신 학교 학생과 성내의 온 주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1,000여 명이 넘는 군중이 시위에 참여하였

으며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습니다.

 

 

당황한 일본군 수비대는 울산 지역 곳곳에 있던 대부분의 순사와 군 수비대를 병영으로 모아 만세를 부르

던 사람들에게 총탄을 발사했습니다. 주민 한 사람이 총탄에 맞아 쓰러지자 함께 있던 주민들은 총탄을 발

사하는 일본군 수비대를 향해 너도, 나도 가슴을 내밀며 나도 쏘라고 외쳤습니다. 이때 총검으로 무장한

일본수비대와 충돌하여 그 자리에서 엄준, 문성초, 주사문, 김응룡의 네 사람이 순국하고 송근찬, 김규식,

김두갑 등 많은 사람이 중경상을 입고 해산당하며 22명은 감옥에 투옥되고 말았습니다.

 

 

생존자들은 당시 대한 독립 만세는 천지를 진동시켰고, 이에 놀란 일제 경찰관 병영 주재소는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온 50명가량의 일본군 수비대와 합쳐 주민들과 육탄전을 전개했다. 이때 병영성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1919년 4월 4일과 5일 이틀간에 걸쳐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병영은 삼일운동 당시 울산의 저항정신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지역 후손들은 울산 병영은 당시 전국에서 그 운동이 가장 치열했고 희생자도  많이 낸 곳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형을 받았던 동지들이 형기를 마치고 돌아오자 그들은 기미계를 만들어 순국한 동지의 외로운 넋을 달래기 위해 매년 비밀리에 빠짐없이 제사를 4월 6일에 받들어 오다가 1955년 영모각을 개수하여 3·1사를 세우고 이들을 안치하는 한편 3·1사 봉제회를 만들어 길이 그들의 뜻을 받들어 오고 있습니다.

 

 

3·1사는 1955년에 현 위치에 세웠다가 이를 남외동 549-1번지로 한동안 옮겼으나 다시 이 자리에 사당을  새로 지었습니다. 숨진 열사들의 시신은 근처 황방산에 주민들에 의해 가매장되었는데, 아직까지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울산병영삼일사봉제회는 매년 4월 5일 열사들이 안장된 황방산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있으며, 4월 6일 삼일사에서는 선열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삼일사의 노래 가사를 보묘 100년 전 그날 독립만세를 되새겨 봅니다.

 

 3.1사의 노래    최현배 작사 나운영 작곡

1절 황방산 뻗어내려 천연성 이뤘으니  /  나라를 지켜오던 좌병영이 아닌가  /

      시루성 영포강은 왜란을 내쫓던 곳  /  삼일사 열사들은 독립을 외쳤도다

(후렴) 청년아 청년아 울산 청년아 삼일정신 이어받아 나라위해 일하세


2절 무룡산 높이솟다 달빛이 더욱밝고  / 산천색 맑고맑아 나라안 으뜸일세  /

      수려한 일산수에 선창도 빛났도다  / 우리는 힘을다해 낙토를 이룩하자

(후렴) 청년아 청년아 울산 청년아 삼일정신 이어받아 나라위해 일하세

 

 

Posted by 정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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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blog.ulsan.go.kr BlogIcon 명품서진 2019.03.03 22: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와 대박 해박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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