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중구 종가로를 따라 걷다 유곡원길로 빠집니다. 길은 태봉산 자락 골짜기를 따라 뻗어있습니다. 소나무가 제법 자라난 숲길은 한낮에도 그늘이 깊습니다. 소나무 숲을 따라 걷다 "동학의 모태지"라는 표지판을 발견합니다. 오늘의 목적지는 바로 수운 최제우 유허지입니다. 



▲ "동학의 모태지"를 안내하는 표지판 

 "인내천 (人乃天) - 사람이 곧 하늘이다."란 뜻입니다. 이는 수운 최제우가 한 말이며, 동학의 정신이 된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하늘처럼 높이 존중받아야할 존재이며, 사람과 사람은 평등하다는 뜻이지요.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지만, 이 한 마디는 조선시대에 혁명과도 같은 개념이었습니다. 


▲ 유허지 마당에 건립된 비석  


조선시대는 신분사회였습니다. 가장 존귀한 존재로는 왕이 있고 그 다음은 양반이 있었습니다. 선비 아래 농민과 공인, 상인이 있었습니다. 신분 뿐 아니라, 성별로 남녀의 차별이 있었습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존재해야 할 사회질서였지만 실상은 조선의 발전을 더디게 만든 족쇄였지요. 



▲ 혼란한 시대, 수운 최제우는 이곳에서 고민한다 


사회가 부패하면서, 조선은 더욱 병들어 갔습니다. 안으로는 내부 모순에 사회가 병들고 있었고, 밖으로는 외세의 침탈이 서서히 시작된 시대였지요. 이런 혼돈을 가장 뼈저리게 느끼는 것은 바로 힘 없는 백성들이었습니다. 생활의 터전을 잃어버린 백성들은 살기 위해 도적이 되는 시대였지요.  

 


▲ "사람은 곧 하늘이다" 


동학은 이런 혼란한 시대에서 탄생했습니다. 몰락한 양반가에 태어난 수운 최제우는 유교의 경전 뿐 아니라 불교와 도교의 책도 공부합니다. 젊은 시절 장사를 하면서, 전국 각지를 돌아다닙니다. 고통받는 백성들의 삶을 체험한 것이지요. 그들과 함께 아파했지만, 고통을 덜어줄 방법은 없었습니다. 


▲ "보국안민" - 나라를 도와 백성을 편한히 한다


청년시절 최제우는 책읽기에 빠졌습니다. 이것은 혼란한 시대를 종식시킬 답을 찾기 위해서인지도 모릅니다. 그가 울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인륜지대사"라는 결혼 때문입니다. 울산에 사는 밀양 박씨와 혼인을 하였고, 유곡원길에 자리한 "수운 최제우 유허지"는 처가가 있던 곳입니다. 

 


▲ 수운 최제우의 초상 


그 당시는 여시바윗골로 불리던 곳이었지요. 여시바윗골에서의 처가살이는 5년 정도 지속됩니다. 고향인 경주로 다시 돌아가기 전까지 수운 최제우는 이곳에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수운 최제우 유허지에 "동학의 모태지"란 표지판이 붙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 울산에서 다시 경주로 


고통을 받던 백성들을 위한 답 - 인내천 (人乃天) 3글자가 언제 나왔는지는 기록에 전하지 않습니다. 수운 최제우가 고향인 경주에 돌아간 직후 동학을 전파했습니다. 그로 추정하면 울산 여시바윗골에 머물던 시절이 아닌가 추정합니다. 유허지에 세운 비석은 기것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 최제우의 첫 실천은 노비해방이었다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려운 법입니다. 수운 최제우는 "인내천 -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말을 어떻게 실헌했을까요? 조선시대 말까지 재산으로 인정받았던 노비를 스스로 해방시켰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두 명의 여종이 있었습니다. 최제우는 한 명은 며느리로 삼았고, 한 명은 수양딸로 삼았습니다. 



▲ 이곳에서 돌아보는 "인내천"의 의미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 중 최제우의 인내천 사상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말이 있습니다. 바로 "어린이"입니다. 천도교도인 소파 방정환이 어린이들을 미숙한 존재로만 보는 언어습관을 안타깝게 여기고 새로 단어를 만들어 정착시킨 것이지요. 여시바윗골에서 조선의 혼란을 고민했던 선인의 흔적을 돌아봅니다.

 






Posted by Tele.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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