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25년인 서기 1592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침략합니다.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의 시작이지요. 부산진성의 함락을 시작으로 해서 이후 7년의 세월동안 조선의 국토는 왜적의 침략으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 창표사 전경 


승승장구하던 왜적의 기세가 한풀 꺽인 것은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첫째, 기습전으로 승기를 잡았지만 보급로가 너무 길어졌기 때문입니다.  해상보급로는 이순신 장군에 의해 철저하게 차단되었지요.  둘째, 의병의 활약입니다.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은 후방을 교란했습니다. 


▲ 주춧돌 없이 바로 기둥을 박아 세운 굴립주 발굴현장 


마지막으로 명군의 참전입니다. 왜군은 "가도정명 -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길을 빌리려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을 정벌하고 인도까지 점령하겠다는 야심을 꿈꿨지요.  결국 망상으로 끝난 이 구상은 명나라를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 겹겹히 요새화한 서생포 왜성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조선과 일본, 명나라는 외교로 문제를 풀려합니다.  조선은 왜군의 철군을 주장했고 일본은 조선의 영토 일부를 요구합니다.  협상은 결렬되었고 다시 전쟁이 시작되지요. 이것이 바로 "정유재란"입니다. 


▲ 가토 기요마사가 쌓은 서생포 왜성  


정유재란은 임진왜란 때와는 전투의 양상이 달랐습니다. 왜적은 울산에서 순천까지,,, 강이나 해안가에 성을 쌓고 방어전에 들어갑니다.  임진왜란 때의 목표는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었다면, 정유재란은 빼았은 땅을 지키는 것이 목표가 되었던 것이지요. 

 

▲ 이 성을 빼았기 위해 조선군은 피를 흘려 싸워야 했다 


왜성은 그런 목적으로 쌓은 것입니다. 왜적의 조선침략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 선조들이 피로 이 땅을 지켜낸 증거이기도 하지요.  가파른 산 위에 쌓은 왜성에 오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이 성을 점령하기 위해 생명을 걸어야했던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노고야 쉽게 짐작이 가지요. 


▲ 서생포 왜성 정상 


기록에 따르면, 서생포 왜성을 건축한 적장은 가토 기요마사입니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라면 "가등청정"이라고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임진왜란 선봉장으로, 조선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을 사로잡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왜성들은 봉화로 서로 연락하여 위급을 알렸지요. 


▲ 서생포 왜성에서 내려다 본 바다 


이곳을 거쳐간 조선의 위인도 있습니다.  바로 승병으로 유명한 사명대사입니다.  사명대사는 평화회담을 위해서 서생포 왜성을 홀로 찾아 가토 기요마사와 담판을 벌였다고 합니다.  생명을 걸고 적진에 홀로 들어선 사명대사 역시 이길을 따라 성에 올랐을 것입니다. 



▲ 조선의 운명을 건 전투 


서생포 왜성을 점령한 것은 조,명 연합군의 수장이었던 명나라 총독 마귀 장군입니다.  창표사를 지어 이곳에서 죽은 병사들을 기린 것도 마귀 장군이지요.  마귀 장군의 증손자 마순상은 청나라가 들어서자 조선에 귀화해 상곡 마씨의 시조가 됩니다. 


▲ 서생포 왜성을 오르며, 역사의 의미를 돌아본다 


그 옛날, 이곳에서는 조선의 명운이 걸린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침략을 당해 빼았겼던 땅을 찾기 위한 전투였지요.  많은 피를 흘릴 후에야 왜군이 쌓은 이 성은 우리 땅이 되었습니다.  서생포 왜성을 돌아보면서 역사를 돌아봅니다.  이곳에서 피 흘렸던 많은 분들의 희생의 의미를 돌아봅니다. 

 





Posted by Tele.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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