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의 이름, 길의 이름에도 역사와 유래가 있습니다. 울산 북구의 효자로(孝子路)는 "효자의 길"이란 의미입니다. 효자로가 있는 울산 북구 효문동(孝門洞)은 "효자를 기리는 정려문이 있는 동네"라는 뜻이지요. 둘 다 조선 초기에 울산에 살았던 한 효자에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 울산 동헌 가학루. 


 사연은 이렇습니다. 조선은 유학의 나라였습니다. 고려가 멸망한 후, 조선을 세웠던 유학자들은 국가의 이념을 유학에서 찾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정책의 변화일 뿐입니다. 신라 이후 불교에 더 익숙했던 백성들의 삶은 쉽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 울산 동헌 반학헌. 


 생활 속에서 유학의 이념인 효도를 장려하기 위해 각지에 있던 효자, 열녀를 널리 알리는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울산에 살던 효자 "송도" 선생의 이야기는 이때 조정에 보고 되었지요. 세종 10년, 예조에서는 각지의 효자, 효손, 효부들을 세종대왕에게 보고합니다. 이때의 일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이곳에서 송도 선생의 효성을 보고하는 보고서가 쓰여지지 않았을까? 


 "울산사람 생원 송도는 부모가 모두 오래된 병을 앓고 있었는데, 10여 년을 모시고 약을 써오다가 부모가 1년 간격으로 연달아 사망하매, 송도는 몸소 흙과 돌을 져다가 분묘를 조성" 하였다고 나옵니다. 송도 선생은 울산 최초의 생원이었습니다. 유교 경전을 익혀 예법에 익숙한 사람이었지요. 




▲ 송도 선생 정려비. 


  실록은 계속됩니다. "상제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좇고 부도의 법을 쓰지 않았으며, 사당을 세워 신주를 받들어 놓고는 새벽에 나아가 분향 알현하고 때에 따라 제사하되, 새로운 음식물을 얻으면 매양 이를 드렸다 하옵니다." 부모를 모시는 장례식은 유교의 가례를 따라 치뤘다는 의미입니다. 




▲ 송도 선생 정려비. 


 이 보고는 울산부사가 올린 것입니다. 각지에 소문난 효자들을 표창하기 위해 예조에서 파발을 띄워 보고하게 한 것이지요. 울산부사는 지금의 울산 북구 효문동에 살던 송도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조정에 보고서를 올리게 됩니다.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다시 심사하여 세종대왕에게 보고를 하였지요. 




▲ 정려각 속 정려비. 


 유학을 공부한 유학자에게 효도는 당연한 일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천은 어려운 법입니다.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란 말이 있습니다. "매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 분향하고, 때에 따라 제사를 지내는" 일은 정성이 없으면 불가능할 것입니다. 사당에 새로운 음식을 얻으면 올렸다 하니 그 정성을 알 수 있습니다. 




▲ 울산부사 영세불망비. 


 조정은 명을 내려 이를 포상하지요. 정려각이 세워진 것은 송도 선생의 효행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정려비를 모신 건물을 정려각이라 하고, 정려각 앞에 세워진 문을 정려문이라고 하지요. 효문동(孝門洞)의 효문(孝門)이란 바로 정려문을 말합니다. 원래 효문동에 있던 정려비와 정려각, 정려문은 옮겨진 것이지요. 




▲ 송도 선생 정려비는 울산부사의 비석과 함께 동헌에 있다.  


  동헌 한쪽에는 역대 울산부사들의 "영세불망비"가 있습니다. 떠나는 울산부사의 선정을 영원히 잊지 말자는 의미로 만든 비석이지요. 나라가 개인의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비와 개인들이 떠나는 관리의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비석이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지요. 




▲ 동헌에서 바라본 풍경. 


 송도 선생의 효행이 세종대왕에게 보고된 것은 서기 1428년의 일입니다. 59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덕행이 전하고 있으니 신기합니다.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은 보존되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정려문이 서 있던 마을은 원래 이름이 효문동으로 바뀌었지요. 600여 년 전 울산에 살 았던 한 효자의 흔적을 돌아봅니다. ^^





Posted by Tele.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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