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솔 최현배 선생 사진과 독립운동가, 교육자, 국어학자였던 그의 일생에 대한 소개

한글문화예술제 포스터, 매년 외솔 생가와 구도심 일대에서 열린다.

 

오늘 제가 소개하는 관광지는 울산의 관광지 중 한 곳이지만 다른 독특한 점이 있다면 바로 실존인물이었던 외솔 최현배 선생에 관한 것이며, 그의 지고지순한 한글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울산이 배출한 유능한 한글학자이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으로서 한글지킴이로서의 시대적 사명을 훌륭하게 감당했습니다.

 

외솔의 어린시절 사진 자료

외솔 선생 젊은 시절 사진

 

외솔 선생은 울산 중구 병영에서 태어나 병영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어린 시절 총명하다는 소문이 자자했고, 학업에 정진할수록 지식이 쌓여져 갔고, 1910년 관립한성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주시경 선생을 만나 국어는 민족정신의 형성 기반이자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본질이라는 강의에 크게 감동받았습니다. 그가 주시경 선생을 만남으로 한글에 더 깊이 다가갔고, 한글사랑이 일제치하의 한민족 문화를 말살하는 일제에 항거하는 가장 좋은 수단임을 깨달았습니다. 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외솔이 1920~1921년 동래고등보통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치며 직접 조선어 교재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국어의 어법 및 문법에 관한 우리말본의 초고가 되었습니다.

 

2008년 복원된 외솔 최현배 선생이 태어나고 자랐던 생가(울산광역시 기념물 제39호)

 

선생은 1922년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1925년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1년간 수학하고, 이듬해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교수가 되었습니다.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준비 위원이 되었으며, 1933년에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제정에 참여하였습니다. 1938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연희전문학교에서 해직되었다가 1941년 복직했고, 1942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1945815일 광복될 때까지 3년간 복역하였습니다. 광복 이후 국어학자, 국어 운동가, 교육 행정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하였습니다. 미군정 시절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문화교육부 편수국장이 되어 교과서 행정의 기틀을 마련했고, 1949년에는 한글학회 이사장에 취임하여 197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헌신하였습니다.

 

외솔 생가 담벼락 앞에 설치된 '최현배-한글 날아오르다' 작품

 

해방 후에도 그의 한글사랑은 이어졌지요. 당시 신문이나 책들 거의가 세로쓰기였고, 한문투성이의 글과 문장이었는데 선생은 한글전용과 가로쓰기를 주장했어요. 한글 전용쓰기는 외솔이 일제강점기에도 주장했지만 그 당시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아 광복 후 본격적으로 이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가로쓰기가 기본이고, 한글을 자유롭게 쓰고 있기에 공기가 귀한 줄 모르듯 그 가치를 폄훼하는 은연중의 행동이 얼마나 많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영어가 들어간 콩글리시와 외래어의 남발은 우리글 한글을 알게 모르게 평가절하 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자답해 보아야할 시점인 것 같습니다.

조선어학회 수난사건과 우리말 큰사전

일제 때 조선어학회 수난사건으로 인한 3년간의 옥살이하는 모습

 

특히 인터넷의 발달과 첨단 스마트 기기의 손쉬운 사용으로 한글에 대한 과도한 파괴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지 필자는 걱정이 많습니다. 텔레비전의 자막에는 신조어가 넘쳐나고 문법도 틀린 한글파괴가 극심해도 우리는 모른채 그냥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플라스틱이 손쉬운 사용으로 생활이 편리해졌지만 미세 플라스틱은 물고기의 뱃속으로 들어가 결국 우리의 밥상에 오르고 그것을 우리가 섭취해 몸 안에 플라스틱이 쌓이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요.

 

외솔 선생 저서와 벼루

외솔 선생이 작사한 '한글 노래' '나라사랑' 악보

 

외솔은 한자와 일본어로 많이 사용되던 말을 한글로 바꾸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직경(直徑)지름, 반경(半徑)반지름, 사사오입(四捨五入)반올림, 마름모(菱形)꽃잎에서 보듯 어려운 한자어를 한글로 바꾸었고, 후미끼리건널목, 벤또도시락, 젠사이단팥죽, 혼다대책꽂이, 간스메통조림 등의 일본어가 아름다운 우리말로 바뀌게 되었고요. 짝수·홀수·세모꼴·덧셈·뺄셈 같은 순우리말도 많이 만들어냈지요. 또 외솔은 한자어와 한글의 사용빈도를 조사했고, 이것을 바탕으로 한글타자기에도 관심을 기울여 타자기의 자판배열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6·25 전쟁 때 임시수도인 부산에서 한글 타자기 경연 대회를 열었고, 1957년에는 한글타자기 자판 합리적 통일협의회를 구성하는 등 한글 기계화에도 선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한글 기계화의 선구자 외솔에 관한 해설자료

  외솔기념관의 한글 관련 책자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해 백성들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고, 외솔 선생은 나라 잃은 백성들에게 가장 좋은 선물인 한글을 계승하며 물려주는 통로가 됐습니다. 이 한글을 아끼지 않는다면 말뜻을 다르게 해석하는 까닭으로 다음세대에 우리는 더 많은 불통을 겪을 것이고, 통일됐을 때 남북한의 언문에 대한 차이와 한글에 대해 이해가 달라 막대한 정신적·금전적 비용을 치러야 할 것입니다.

 

외솔기념관 옆에 나란히 서있는 외솔 한옥도서관

외솔 한옥도서관의은 좌식이어서 난방시설을 통해 바닥이 따뜻하다. 

 

한글이 목숨이라는 철학을 지녔던 그는 평생에 걸쳐 20여권의 책자를 발간하며 국민들을 계몽하는 국어학자요 한글의 발전을 위해 불철주야 애썼던 시대의 선각자였습니다. 외솔기념관에 가서 외솔의 한글사랑을 조금이라도 깨닫고, 우리에게 선물로 그저 주어진 한글을 귀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면 그보다 유의미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또 외솔을 기념해 지어진 한옥도서관에서 짧은 시간이라도 자녀들과 함께 책 읽는 모습을 가진다면 그 또한 멋진 추억거리가 될 것입니다. 중구청은 매년 한글날을 맞아 외솔기념관과 문화의 거리 일대에서 한글문화예술제를 이어가면서 외솔의 한글사랑에 대해 알리고 있습니다.

 

한글 낱말 만들기와 한글 낙서판이 마련된 체험 공간

 

 

 

 

 

Posted by 박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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