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제우(1824〜1864)는 경주 출신으로 호는 수운이며, 외세의 침략과 봉건사회의 모순에 반대한 종교였던 동학의 교조입니다.

이곳은 '울산시 기념물 제12호'로 조선 후기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가 수도생활을 하다 전서를 받고 도를 깨우친 장소로, 이곳에 조성된 생활공원은 개발제한구역 내 지역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녹색여가공간으로 국토교통부 공모에 선정된 사업입니다.


수운 최제우 선생이 동학을 창시하게 된 계기가 된 곳이 울산입니다.

세도정치와 수탈, 외세 침입으로 서민들의 삶이 날로 피폐해지던 조선 후기 경주 유학자 최옥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혔던 수운 최제우 선생은 10대에 부모를 여윈 뒤 유랑 생활을 시작합니다.


10여 년의 유랑 생활을 하면서 최제우는 당시 민초들의 삶을 피부로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랑 생활을 마치고 정착한 곳이 처가가 있던 중구 유곡동입니다.


이곳에서 최제우는 한 승려로부터 을묘천서란 책을 받아 뜻을 깨치고 본격적인 구도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곳에서 세운 뜻은 양산 천성산 적멸굴에서의 49일 단식 수행 등으로 이어졌고 5년의 수련 끝에 동학사상을 완성시켰습니다.


 

난세에 참된 도를 구하려 했던 수운 최제우는 양산, 울산, 경주 지방에서 수련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860년 4월 5일 마침내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통해 도를 구하고, 그 이듬해부터 포교를 시작합니다. 1863년에는 경상도와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를 넘어 경기도까지 교세를 떨쳤습니다.


교인은 3천여 명에 이르렀고, 지방 종교조직인 접소는 13개소를 확보하게 됩니다. 동학을 널리 펴던 수운 최제우 선생은 유교의 가르침을 어지럽혀 백성들을 현혹시킨다는 '좌도난정'의 죄목으로 경상감영감옥에(현, 대구종로초등학교)있던 처형장인 관덕당 뜰에서 참형됩니다. 1864년 3월 10일 41살의 젊은 나이였습니다.


▲ 최제우 나무(회화나무)

 

감사의 효수형 명령이 떨어지자 수운 선생을 지켜보던 회화나무 잎사귀에서 수액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고,

이를 전해 들은 사람들은 그 회화나무를 '최제우 나무'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울산과 인근 지역에서 태동한 동학은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며 봉건적 조선시대에 최초로 민중을 개혁세력으로 등장시켰습니다. 수운 최제우 유허지를 돌아보면서 동학사상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Posted by 정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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