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선비의 나라였습니다. 조선시대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했던 필독서 "논어"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입에 담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 " 모든 일을 예절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 그가 바로 선비였습니다. 

 

 

▲ 울산향교 전경.


 조선이 정책적으로 선비를 키웠다는 것은 조선이 건국하고 태조 이성계가 내린 명령에서 드러납니다. 중앙에는 국학(國學)과 지방에는 향교(鄕校)에 생도(生徒)를 더 두고 강학(講學)을 힘쓰게 하여 인재를 양육하게 할 것이다. " 태조 1년 7월 28일. 서기로는 1392년의 일이지요. 

 


▲ 울산향교 명륜당.


 조선 태조가 즉위한 것은 음력 7월 17일의 일이니, 이 정책은 즉위 10일 만에 반포된 것입니다. 조선 태조가 얼마나 국가의 인재를 키우는 것을 우선시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서울에는 국학을 두고, 지방에는 향교를 둡니다. 



▲ 울산향교 전경


 나라의 인재를 키움에 있어 서울과 지방을 구분하지 않았고, 지방의 인재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또한 신라나 고려 때 있었던 혈연이나 학연에 의한 인재 추천 방식인 음서제의 폐단을 지적하며, 나라의 인재를 뽑는 것은 오직 공정한 시험으로 한정할 것이란 선언 또한 이어지지요. 



▲ 명륜당에 걸린 울산향교 중수기.


 이 정책에 따라 울산의 향교 또한 울산 곳곳에서 모여든 젊은 유생들이 학문을 익히고, 심신을 수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울산향교에는 얼마나 되는 선비들이 공부를 했을까요? 이 또한 기록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 명륜당에서 내려다본 풍화루 모습. 


 향교에서 공부하는 학생을 유생이라 했는데, 유생의 수는 행정기관의 크기에 따라 구분했습니다. 부·목은 90명, 도호부(都護府)는 70명, 군은 50명, 현은 30명이 정원이었습니다. 조선이 건국할 때 울산은 군이었습니다. 울산향교에는 최대 50명이 되는 유생들이 공부를 했던 것이지요. 


 


▲ 명륜당에서 대성전 가는 길.

 

 학생인 유생을 지도하는 선생님은 어땠을까요? 교수와 훈도, 각 1명씩 두어 지도했다고 전해집니다. 누군가의 스승이 되는 것은 선비에 있어서 대단한 영광이었습니다. 향교의 교수가 되었다 함은 나라가 그 사람의 학문을 인정한 셈이니 더욱더 빛이 나는 자리였습니다. 



▲ 울산향교 대성전.  


 향교에 드는 비용의 문제 또한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나라는 각 향교에 일정 수준의 토지를 수여하였습니다. 이를 학전(學田)이라 했지요. 각 향교는 여기에 나오는 이익을 이용해서 향교에 드는 비용을 충당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토지를 임대하고 지대를 받은 것입니다. 


 

▲ 담장 넘어 멀리 고층빌딩이 보인다.  


 향교는 크게 두 공간으로 나뉘어집니다. 앞쪽 명륜당 공간은 유생들이 교수에게 가르침을 받고 공부하는 곳입니다. 뒤쪽 대성전 공간은 옛 성인들을 모시는 신성한 곳입니다. 대성전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 제사를 모시지요. 


 

▲ 울산향교의 맥은 유림회관으로 이어진다.  


 선비들의 위대한 점은 학문을 그저 출세를 위한 수단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때를 얻지 못하면 물러나 학문을 연마하고, 때를 만나면 나아가 벼슬한다."는 것이 그들의 자세였지요. 가을날, 울산향교를 거닐며 옛 선비의 정신을 되돌아봅니다. ^^

 






Posted by Tele.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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