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의 의미와 알고 있어야 할 울산의 독립운동가들

 

휴가와 방학으로 하루하루가 즐겁고 설레는 8월. 이 달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경사로운 사건이 벌어졌던 날이 있는 달이기도 해요. 바로 8월의 딱 중간에 있는 8월 15일 광복절입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참혹한 수모를 겪었던 일제 강점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것은 수많은 분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애써주신 덕분인데요. 다가오는 8월 15일 광복절의 의미와 함께 일제의 핍박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조국의 독립에 힘썼던 울산의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는 시간을 가져보아요.

 

 

 


광복절의 의미


 

 
광복절은 우리 민족이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1910년부터 35년간의 기나긴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에게서 독립하여 국권을 회복한 것을 기념하는 뜻깊은 날이에요.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매년 8월 15일을 ‘빛을 되찾다’는 뜻의 ‘광복절’이라 명명하여 잃었던 국권을 회복한 것을 국가에서 경축하는 국경일로 지정하였습니다.

 

 

 


울산의 독립운동가


 

8.15 광복절이 되기까지 많은 독립운동가 분들의 노력이 있었죠. 울산에도 일제로부터 우리의 자유를 찾기 위해 국내외에서 애국 활동을 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울산에서 활동하셨던 유명한 독립 운동가 두 분을 소개해드릴게요.

 

 

1. 박상진 의사(1884,12.7~1921.8.11)


1884년 전통적인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고 의병을 일으켰던 허위로부터 학문을 배웠던 박상진의사는 척사적 반외세 민족의식을 키우면서도 근대적 신학문을 배워 1910년 판사 시험에 합격합니다. 평양 법원에 발령을 받았지만 경술국치로 일제에게 나라의 국권이 빼앗기자 판사직을 사퇴하고 1911년 만주로 건너가 허겸, 손일민, 이상용 등의 지사들과 교류하며 독립투쟁에 뛰어듭니다.


1912년 귀국한 선생은 대구에 독립운동의 정보 연락과 재정적 지원을 목적으로 상덕태상회를 설립하였고, 만주의 곡물상과 연락망을 구축하여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러던 중 1915년 대구의 독립군 지원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하여 대구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지방의 현신 유림들을 주축으로 하여 곡물상의 상업 조직을 통해 독립군을 지원하는 활동을 시작합니다.


이후 보다 강력한 독립군 단체를 조직하기 위해 풍기광복단과 제휴하여 대한광복회를 결성하고 총사령관을 받아 혁명적 독립운동단체로써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될 때 일제히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계획을 세웁니다. 혁명의 거점으로는 국내 각처에 곡물상을 개성하고 만주의 신흥학교 등과 연결하여 독립군의 양성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러던 중 친일부호들의 비협조로 자금이 제대로 조달되지 않자 문제 해결을 위해 강제 모금의 방법을 택하고, 1916년 무기 구입을 위해 만주를 다녀오는 길에 서울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출옥 후에도 군자금을 모으는 데에 더욱 힘을 쏟아 친일부호들을 처단하는 의열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처단 고시문을 붙여 만천하에 대한광복회의 이름이 알려지게 됩니다. 이 일로 1918년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일경에 발각되어 다시 체포되었고, 사형을 선고받아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합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2. 최현배 선생(1894,10.19~1970.3.23)


1894년 울산 출생의 최현배선생은 1910년 5월부터 3년간 매주 일요일에 개최한 주시경의 조선어강습원에서 한글과 국문법을 배우고 독립사상을 고취받아 평생 국어의 연구와 국어 운동의 길로 들어선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입니다.

 

1925년에 일본 경도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여 졸업하고, 1926년 동대학원에서 수학하는 중에 한국 민족이 다시 독립하는 방도를 다각적으로 연구하여 [조선민족갱생의 도]를 저술하였습니다. 1926년에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초빙되어 11년간 재직하면서 그 사이에 한글 연구에 정진하여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해서 1929년 107명으로 구성된 ‘조선어사전편찬회’에 참가했으며, 1934년 4월 [중등 조선말본]을 간행했습니다.


그러던 중 1938년 2월에 안재홍 등 기독교 청년연합회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의 단체인 흥업구락부의 독립사상 고취 운동으로 일시 구속되어 조사를 받고 교수직에서 강제 해직되었습니다. 실직된 기간에는 한글 연구에 더욱 집중하여 1941년에 그의 대표작 [한글갈]을 간행하였으나, 1924년 10월 일제가 민족탄압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면서 한글 연구자들을 투옥하기 위한 조선어학회 운동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서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습니다. 이후 1945년 1월 16일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8.15 광복으로 출옥하게 됩니다.

 

광복 이후에도 한글학회 이사장, 문교부 편수국장, 민족문화추진위원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글 연구와 한글 운동에 전념하고, 한글 가로 글씨의 실험과 한글 기계화 운동을 추진하는 등 평생을 한글연구와 독립운동에 힘쓴 공훈을 기리어 1962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독립장, 건국공로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 받았습니다.

 


 

 

어둡고 고통스러운 일제의 식민지 아래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싸워준 독립운동가 분들의 희생이 있어 우리나라가 빛을 되찾은 광복절을 매년 기릴 수 있게 되었어요.

다가오는 광복절에는 목숨 바쳐 나라를 지켰던 독립유공자 분들을 기억하고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으로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어떨까요?

 

 

Posted by 울산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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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1.28 17: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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