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조선의 군사시설이 있던 봉대산 - 산행으로 만나는 역사


파발과 봉수는 옛 조선시대의 중요한 국가통신망이었습니다. 북방의 여진족이나 남방의 왜적이 국경을 침입하면 먼저 봉화를 올립니다. 봉화는 갯수로 위급함을 구분합니다. 평시에는 횃불을 한 개, 적이 나타나면 두 개,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세 개, 국경을 넘어오면 네 개, 적과의 전투가 벌어지면 다섯 개를 올리는 것이지요. 



▲ 봉대산에 오르는 길.


조선왕조 실록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초적(草賊)이 나오는 요로(要路) 가운데 망(望)을 볼 수 있는 높은 봉(峰)에 봉수(烽燧)를 설치하고 척후(斥堠)를 부지런하게 하여, 만약 침입하는 적(賊)이 있으면 병마사(兵馬使)가 정장(丁壯)을 거느리고 가서 변(變)에 대응하게 하소서,"



▲ 봉대산의 녹음은 푸르다. 


봉화는 빠르나, 전달할 수 있는 정보가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를 보충하는 것이 파발입니다. 봉수로 적의 침입을 알 수 있지만, 적이 몇명인지, 어떤 행동을 하는지, 충분히 격퇴 가능한지, 아니면 보충해서 병사를 보내야하는지 구체적인 정보는 파발로 보내는 것이지요. 



▲ 남목마성으로 가는 길.


파발은 말을 타고 보고서를 전하는 기발과 걸어서 문서를 전하는 보발이 있습니다. 25리마다 역참을 두고 항상 말을 준비합니다. 말을 타고 온 병사들이 릴레이 식으로 문서를 주고 받으며 멀리 남쪽과 북쪽의 국경지대에서 한양까지,,,봉수로 전하지 못한 소식을 전하는 것이지요. 


 

▲ 남목마성의 잔해.


봉대산은 울산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해발 189.8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위치이지요. 이곳은 조선시대 국가통신망이었던 봉화대가 있습니다. 또한 파발의 근간이던 말을 키우는 남목마성 또한 이곳에 있지요. 



▲ 마성의 말 울타리.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이보다 먼저 말을 점검(點檢)하는 별감(別監)이 각 고을에서 나누어 기른 국마(國馬)의 파리함과 사고로 잃은 것을 점검(點檢)하여, 모두 태형(笞刑) 30대를 시행하고 차등(差等)이 없었는데, 지금 고쳐 정하기를, 파리하게 한 것은 태형 30대를 치고, 사고로 잃은 것은 태형 50대를 치기로 하였다."



▲ 주전 봉수대에서 바라본 남쪽의 풍경. 


말은 국가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자원이었습니다. 갑주를 입고, 말을 탄 기병은 전장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지요. 말을 키우기 위해 국가가 땅을 일구고, 사람을 파견해서 관리했습니다. 남목마성은 그 중 하나이지요. 관리책임자가 잘 관리하지 않아 말을 잃으면 태형에 처할 정도로 엄중하게 관리한 것이지요.

 


▲ 주전 봉수대.


남목마성을 넘어 주전봉수대로 향합니다. 주전봉수대는 남목마성에서 직선거리로 1㎞입니다. 산길은 잘 정비되어 걷는 길은 즐겁습니다. 이곳에 봉수대를 설치한 이유는 도착하면 바로 알 수 있지요. 남과 북으로 바다가 환하게 보이는 산 위에 위치하고 있기에, 남쪽에서 봉화 신호를 받기도 쉽고, 북쪽으로 전하기도 쉽습니다. 



▲ 아쉽게도 봉수대는 옛 모습을 잃었다. 


아쉽게도 주전 봉수대는 옛 모습 그대로가 아닙니다. 봉수대는 5개의 봉화를 한번에 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일종의 국가표준이지요. 하지만, 주전봉수대의 옛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한 눈에 탁 트인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왜 이곳에 어렵게 봉수대를 유지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옛 조선의 국가통신망을 확인하다. 


봉대산에 올라 남목마성과 주전봉수대를 돌아봅니다. 옛 조선시대 이곳은 국가에 의해 엄중하게 관리되었습니다. 봉대산 위쪽에는 목장이 있고 말을 가둬 키우던 돌울타리가 마치 성처럼 쌓여 있었지요. 바다에 바짝 붙은 산봉오리에는 위급을 알리던 봉수대가 있었습니다. 옛 조선의 국가통신망을 이곳 봉대산에서 확인합니다.  








Posted by Tele.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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