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과 백양선사의 옛 역사가 깃든 절

 

 함월산 백양사의 역사는 신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신라의 56대 왕인 경순왕이 백양선사에게 절을 지으라 명을 내리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울산 함월산 백양사의 탄생입니다. 역사적 배경을 빼고 본다면 이상할 것 없는 이야기입니다.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신라인지라 신라의 왕들은 종종 절을 지으라 명을 내렸습니다. 경주 곳곳에 남아있는 옛 절터 역시 그 근원을 따지고 가면 신라의 권력자들의 시주로 시작된 것이지요.  

 


 

 그렇지만, 함월산 백양사가 특별한 이유는 백양사가 조성된 시기와 목적 때문입니다. 경순왕은 신라의 마지막 왕입니다. 때는 후삼국시대라 불린 혼란기였지요. 북방에는 후고구려의 견훤을 물리친 왕건이 그 세력을 넓히고 있었습니다. 또한 서쪽에는 후백제를 세운 영웅 견훤이 신라를 호시탐탐 위협하고 있었지요. 이 위협은 단순히 신라의 땅을 위협하는 수준이 아니였습니다. 경순왕의 6촌형이자 선대왕인 경애왕은 수도 서라벌에서 견훤의 침공으로 살해당합니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포석정에서 견훤의 칼에 맞았다고 하는데, 이는 후대에 신라의 왕 경애왕이 국사를 멀리하고 포석정에서 술자리를 벌이다 나라를 망쳤다고 해석되었습니다. 이 설이 뒤집힌 것은 포석정에 관한 연구가 진행된 이후의 일입니다. 포석정은 임금이 술자리를 벌이던 한가로운 자리가 아니라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제사를 지녔던 곳이란 분석이지요. 경애왕의 명예가 회복된 셈입니다. 

 

 


 경순왕이 왕이 된 시대적 배경은 이러합니다. 천년의 왕국 신라는 그 기운이 다하고 있었습니다. 나라가 무너졌으니, 그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처참하게 변했을지는 상상이 가는 대목입니다. 경순왕 개인으로서도 왕좌의 날들은 고통이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6촌형이자 전대왕 경애왕이 수도 서라벌에서 적의 침공으로 칼에 맞아 죽었으니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을 것입니다. 

 



 백양사는 이러한 시기에 조성되었습니다. 경순왕은 백양선사에게 명을 내려 국태민안을 비는 절을 지었던 것이지요. 이때가 서기 932년의 일이지요. 경순왕이 경애왕의 뒤를 이어 신라의 왕이 된지 다섯 돌이 되던 해입니다. 경순왕의 선조인 신라의 왕들이 그러하였듯, 불사로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였습니다.   

 


 역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다들 아시는 것처럼, 경순왕의 이런 시도는 무위로 끝이 나지요. 신라의 기운은 다 하였고, 삼한은 새로운 영웅에 의해 다른 시대로 들어서게 됩니다. 바로 송악에서 일어선 고려 태조 왕건입니다. 경순왕 역시 시대의 흐름을 읽고 신라의 문부백관을 거느리고 고려에 귀순하게 됩니다. 후백제 또한 내부의 권력다툼으로 견훤과 아들 신검이 차례로 고려 태조에게 무너짐으로써 결국 후삼국은 고려가 통일하게 되지요.  

 

 


 천년의 왕국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세운 백양사는 그 후 천년 동안 함월산은 지키게 됩니다. 고려가 무너지고, 다시 조선이 들어서고 망하는 동안 백양사는 몇 번의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호적한 산골이였던 백양사 주위가 도시계획으로 신시가지가 된 점이랄까요. 사자성어 그대로 "상전벽해(桑田碧海)" - 뽕나무 밭이 변해 푸른 바다가 된 격이지요. 함월산 백양사를 거닐며 그 옛날 경순왕이 기원했던 "국태민안"의 의미를 다시 돌아봅니다. 

 


 



 



Posted by Tele.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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