良人去時但搖手(양인거시단요수) 

우리 님 떠나시던 때, 손을 흔드시더니

 

生歟死歟音耗斷(생여사여음모단)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도 없구려.

 

音耗斷長別離(음모단장별리) 
소식 끊기고 헤어진지 오래라,

 

死生寧有相見時(사생녕유상견시)
죽든 살든 다시 볼날 있으리오.

 

- 점필재 김종직의 한시 치술령 중 일부 

  


▲ 박제상 유적지로 가는 길


 서원을 지은 목적은 옛 선인을 기려 제사를 지내고, 후학을 키우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보통 그 지역의 오랜 충신과 학자가 서원에서 모셔지는 것이지요. 시대가 지났기에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같은 지역에 살았던 옛 선인의 자취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조선시대 서원에서 학문을 연마하던 선비들 역시 그 자취를 봤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자기 고장에 대한 애정과 학문을 갈고 닦을 원동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 치산서원

 치산서원은 신라의 충신 박제상을 기리기 위한 곳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박제상과 그의 아내를 기리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조선 사림의 큰 학자이기도 한 점필재 김종직은 한시를 써 박제상의 일을 노래합니다. 이 시는 조금 특별합니다. 바로 여성인 박제상의 아내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것이지요. 선비의 경우 남성인지라, 남자의 관점에서 보기 쉽습니다. 이는 점필재 김종직의 작품 뿐 아니라 조선 전체를 봐서도 특이한 케이스입니다.  

 

 



▲ 현대에 지은 박제상 기념관


 박제상은 신라의 초대국왕 박혁거세의 9세손, 파사이사금의 5세손입니다. 대대로 내려온 신라의 명문인 셈이지요. 후에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당시만 해도 약소국이였습니다. 고구려와 일본에 인질을 보내, 평화를 얻을 정도였습니다. 서기 417년, 새로 신라의 왕으로 즉위한 눌지왕은 이런 신라의 답답한 현실을 극복하려 했습니다. 고구려에 인질로 간 아우 복호, 일본에 인질로 간 아우 미사흔을 돌려 받아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는 외교를 펼치고 싶었지요.  

 

 



▲ 경주에서 고구려의 수도 평양으로, 다시 경주에서 울산을거쳐 일본으로 박제상의 여정


 이 때 나선 인물이 박제상입니다. 당시 외교사절로 파견되는 인물은 엄청난 식견과 능력을 요구 받았습니다. 평화시 보내는 외교사절도 그러한데 인질로 보내진 왕족을 돌려 받는 일입니다. 박제상이 신라에서 얼마나 인정 받았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또한 자신의 생명 또한 보장되지 않는 일이라, 미래나 부귀영화에 대한 보장도 없습니다. 신라의 답답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박제상은 자신의 생명을 걸었습니다. 


 


 


▲ "신라의 개,돼지가 될 지언정 왜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 


 박제상은 고구려의 수도 평양에 가서 고구려왕을 설득하여 복호를 돌려 받았습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 양국 간의 이해관계로 조율한 성공적인 외교인 셈입니다. 보통은 이에 만족하지만, 박제상은 바로 일본으로 배를 타고 떠났습니다. 당시 신라의 서라벌에서 바다로 가는 길은 두 갈레, 그 중 박제상은 지금의 울산인 율포에서 출발했다고 추정됩니다. 이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박제상의 아내가 울산 울주군 치술령에서 박제상을 기다리다 끝내 돌이 되었다는 망부석 설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치산서원 안의 관설당은 박제상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 


 고구려와는 달리 왜와의 교섭은 잘 되지 않았습니다. 박제상은 죽음을 각오하고, 미사흔을 몰래 배로 신라로 보냅니다. 자신이 남은 이유는 일이 발각되어 모두 잡힐 것을 두려워 한 때문입니다. 남아서 시간을 끌어 다른 이들이 안전하게 신라로 돌아갈 시간을 끈 것이지요.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왜왕은 그 의기에 감탄하여, 높은 벼슬과 많은 재산으로 박제상을 설득했다고 합니다. "신라의 개,돼지가 될 지언정 왜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 충신 박제상의 마지막 말은 이러했습니다. 

 

 



▲ 박제상 추모비


 박제상의 희생으로 신라는 고구려와 왜와 비로서 동등한 외교관계를 수립했습니다. 약소국 신라가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하게 된 출발이라 볼 수도 있지요. 박제상의 충절은 신라가 망한 후에도 두고두고 회자되었습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 등 당시의 일을 기록한 역사 책 뿐 아니라, 조선 세종 때 편찬된 충신을 기록한 삼강행실도에서도 언급되었지요. 또한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부인의 애뜻한 이야기 역시 설화로 이어지게 됩니다.

 

지금의 치산서원과 박제상 기념관 역시 이 추모의 연장인 셈이지요. ^^

 




 

 


Posted by Tele.mann

댓글을 달아 주세요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