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비밀결사운동과 박상진의사
즐기 GO/문화예술2015. 6. 24. 08:00


1910년대 비밀결사운동과 대한광복회에 대해서 


광복7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다가오는 광복절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데요.

일제강점기 때 우리 민족의 '광복'을 위해 선열들이 어떠한 노력을 했고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역사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1910년대 울산출신 박상진이 사령관이었던 대한광복회로 대표되는 경상도지역의 비밀결사운동을 살펴보겠습니다. 




1910년대 비밀결사운동이 펼쳐진 이유와 의의는?


1910년 국권 상실로 말미암아 의병전쟁/계몽운동계열의 독립운동은 활동기반을 잃어버렸습니다. 따라서 일제 무단통치에 대항하는 투쟁 방법을 바꿀 수 밖에 없었습니다. 즉, 1910년대 독립운동은 일제의 무단통치로 인해 지하로 잠적거나 국외로 망명하여 새로운 항일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저항의 한 형태로 비밀결사조직인 독립운동단체는 1910년대 국민적 저항정신을 기반으로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합니다.



그러나 결성된 단체들은 비밀결사라는 특수성 때문에 지하활동과 테러전술, 해외와 국내 회원간의 연락을 위한 초보적인 조직을 갖추는데 그쳤습니다. 또한, 무장조직·봉기조직으로 발전하거나 대중적 힘을 끌어들이는데 까지는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비밀결사운동은 1918년 대한광복회 검거를 끝으로 모두 와해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활동의 경험은 3·1운동 당시 전국에 걸쳐 대중운동을 지도한 비밀결사조직의 모체가 되어 3·1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형성하는데 기여했습니다.




경상도지방의 비밀결사운동 단체들은 어떤 활동을 했을까?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지역은 경상도였습니다. 이 시기 경상도지방의 독립운동단체로는 대동청년단, 달성친목회, 풍기광복단, 민단조합, 조선국권회복단, 대한광복회 등이 있었습니다. 


의병전쟁계열 독립운동단체 : 풍기광복단, 민단조합, 대한광복회

계몽운동계열 독립운동단체 : 대동청년단, 조선국권회복단 

 

대동청년단

결성시기

 1909년

구성원

 안희제, 서상일, 이원식, 남형우 등
 경상도출신의 계몽지식인 중심

활동내역

 - 독립운동의 방향을 국내 쪽으로 두고 군자금 조달과 인재 육성
 - 국내외 연락(만주 항일독립운동 단체,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달성친목회

결성시기

 1908년 9월

구성원

 이근우, 김용선 등의 계몽지식인

활동내역

 -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한 친목회를 표방하며 계몽운동 전개
 - 1910년대부터 항일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의 성격을 띰


풍기광복단

결성시기

 1913년 정월 

구성원

 채기중, 유창순, 유장렬, 한훈, 정진화,
 김상오 등 경북/충청도 출신 인물 중심

활동내역

 -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기 구입과 군자금의 모집

 - 채기중, 강병수가 일본인이 경영하는 중석광산에 잠입, 부호를 대상으로 자금수집 활동을 함


민단조합

결성시기

 1914년 9월

구성원

 이동하, 이은영, 김락문 등 의병출신

활동내역

 - 해외 독립운동단체를 지원하기 위한 독립군/군자금의 모집

 - 풍기광복단과 대한독립의군부(충청·전라도)의 활동 계승


조선국권회복단

결성시기

 1915년 정월 

구성원

 서상일, 이시영, 박영모, 홍주일, 안확 등
 계몽지식인/부호/중산층/신학문/유생

활동내역

 - 해외 독립운동단체를 지원하기 위한 독립군/군자금의 모집

 - 대구권총사건, 대동청년단과 연계하여 상해 임시정부 지원, 3·1운동 지방 확산에 기여


대한광복회

결성시기

 1915년 7월 

구성원

 박상진 주도, 채기중, 우재룡 등 

활동내역

 -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을 발전적으로 통합

 - 일제의 무단통치로부터 무력투쟁을 통한 독립의 쟁취를 목표

 - 국권 회복과 공화주의 표방, 독립군 양성과 무기 구입, 친일부호 습격 처단

 - 이념적, 전략적 측면에서 1910년대 항일 민족 운동의 새로운 지향과 발전된 모습을 보여줌

 

 

 

대한광복회 결성을 주도한 박상진의사, 그는 누구인가?


대한광복회 결성을 주도한 인물은 박상진의사입니다. 


1884년 울산 송정동에서 태어난 그는 규장각 부제학 박시규의 장남이었습니다. 박상진의 가문은 대지주이며 대대로 문한을 배출한 유학자 집안이었습니다. 그는 16세까지 경주 녹동에서 한학을 수업하고, 1902년 당시 19세에는 허위의 문하에서 배웠습니다. 1907년부터 3년 동안은 양정의숙에서 법률과 경제 등 신학문을 전공했고,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해서 평양법원에 발령받았으나 사퇴하고 만주로 건너갑니다.

박상진은 만주를 여행하면서 중국의 혁명 상황을 돌아봤습니다. 특히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과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등의 국제상황은 독립운동을 크게 자극했고, 이에 박상진은 1912년 귀국하여 자신의 재산으로 대구에 곡물을 취급하는 상덕태상회를 설립합니다. 박상진은 이 상회를 경영하면서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의 관련 인사들과 교유를 확대하여 활동기반을 조성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후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면서 좀 더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1915년 7월 15일 대한광복회를 결성합니다. 사령관은 박상진이었습니다. 


대한광복회는 경상도지역 뿐만 아니라 전국 각도 및 서간도와 북간도에까지 그 조직망을 확대하였습니다. 대한광복회의 성격은 박상진의 비밀·폭동·암살·명령이라는 4대 강령으로 나타났고, 이것은 다음과 같은 대한광복회의 실천사항으로 더욱 구체화됩니다. 



 ① 무력준비 : 일반부호의 의연(義捐)과 일본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해 이로써 무장을 준비함.

 ② 무관양성 : 남북만주에 사관학교를 설치하고 인재를 교양해 사관을 채용함.

 ③ 군인양성 : 우리 대한의 의병·해산 군인 및 남북한 이주민을 소집해 훈련, 채용함.

 ④ 무기구입 : 중국과 노국에 의뢰해 구입함.

 ⑤ 기관설치 : 대한·만주·북경·상해 등 요처에 기관을 설치하되, 대구 상덕태상회에 본점을 두고 

        각지에 지점 및 여관 또는 광무소(鑛務所)를 두어 광복회의군사행동·집회·왕래 등4

        모든 연락기관으로 함.

 ⑥ 행형부 : 일본인 고등관과 우리 한인 반역분자는 수시수처(隨時隨處) 포살을 행함.

 ⑦ 무력전 : 무력이 완비되는 대로 일본인 살육전을 단행하여 최후 목적 완성을 기함.


박상진의 비밀·폭동·암살·명령이라는 4대 강령에 따른 대한광복회 실천사항


이와 같은 실천사항에 따라 대한광복회는 군자금의 모집, 사관과 군인으로 구성된 독립군의 양성, 무기구입, 활동조직의 설치, 친일부호의 처단 등의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이처럼 대한광복회는 그 조직망을 확충하고 무력투쟁을 실현하기 위한 준비를 박상진의 주도하에 추진됐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한광복회의 활동은 1918년 1월 27일 천안군 성환에서 장두환이 체포됨에 따라 그의 전모가 노출되고 말았습니다. 박상진은 1916년 7월 남경에 도착하여 손문을 방문하고, 1918년 1월 27일 이종국이 천안경찰서에 밀고하여 조직이 전모가 드러나자 귀향하였다가 체포되어 1921년 8월 11일 대구감옥에서 38세의 일기로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박상진의사에게는 1963년에 국민장이 수여됐습니다. 




울산 가볼만한 곳 : 박상진의사 생가


박상진 체포 이후 박상진가는 급격히 몰락했습니다. 

원래 박상진가는 당시 시가로 6∼7만원에 해당하는 99두락의 농토를 소유한 대지주집안이었습니다만, 박상진은 상덕태상회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으로 생부 박시규와 상의도 없이 미쓰이회사에 이 땅을 담보로 이미 10만원을 빌린 처지였습니다


▲ 울산 박상진의사 생가 (울산 북구 박상진길 23)


더구나 박상진이 군자금으로 활용하기 위해 재산을 관리하라고 맡겨 둔 사촌처남 최준은 그가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자 그와의 연루를 피하기 위해 맡긴 재산을 모두 자신이 산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박상진이 사형을 당한 후 재산은 모두 최준의 소유가 되었고, 그의 집안은 완전히 몰락하고 맙니다.


다행히 2002년 울산시가 매입하여 2007년 복원 정비 사업을 완료했습니다. 이 집은 사랑채, 안채 등 모두 6동의 건물로 이루어진 기와집으로, 전체적으로 볼 때 'ㅂ'자형 구조를 가진 조선 후기 양반 살림집입니다.




 개인의 희생을 뒤로 한 채, 대한독립을 위해 애썼던 1910년대 독립운동단체들과 박상진 의사. 그들의 노력은 결국 전국을 태극기로 물들게 했던 3·1운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렇듯 애국선열들의 피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광복. 후손된 입장으로 광복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고, 6월 7일부터 8월 15일 광복절까지 집 앞에 태극기를 게양해 나라 사랑을 표현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