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는 조선시대 조선과 일본을 오가는 평화의 사절이였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일본의 조선 침략, 흔히 왜란이라 불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후 전쟁의 참사를 수습하기 위해 일본이 조선에 가장 먼저 요청한 것이 바로 이 조선통신사의 파견입니다. 요즘으로 비교하면 일종의 외교사절단을 파견해 달라는 요구이지요. 그 요구를 받아들인 조선은 통신사를 파견했고, 이후 정기적인 조선통신사를 통한 교류는 조선과 일본의 평화의 초석이 됩니다. 불행히도 조선통신사의 교류가 끊어진 뒤, 일본에 의한 조선 침략이 다시 시작됩니다.  

 


 이것이 흔히 알려진 조선통신사의 역사입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이전에도 자신의 생명을 걸고 조선에서 일본을 오가며 양국의 평화를 위해 몸바친 울산의 선조가 있습니다. 바로 이예 선생,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예는 울산의 향리(蔚山群吏)이며, 직책은 기관(記官)이었다" 향리는 중인출신이 맡은 직책입니다. 또한 기관이란 기록을 맡은 일선의 관리를 말합니다. 



 지방에서 평범하게 살던 이예의 삶을 송두리채 뒤바꾼 일은 조선 태조6년인 1397년 1월 31일 벌어집니다. 3천여명의 왜구가 울산에 침입하여 군수 이은과 많은 조선인을 사로잡아 일본으로 끌고 가게 됩니다. 이예는 이때 달아날 수 있었으나 자신의 상관인 군수를 모시기 위해 스스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는 달아난 다른 벼슬아치의 행동과 대비되는 것으로, 그의 태도는 끌고가는 왜구를 감복시킬 정도였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예는 곧 풀려나게 됩니다. 조선 조정에서 이 무도한 침탈을 묵과하지 않고 외교관을 파견하여 끌려간 조선사람을 풀어주도록 압박했기 때문입니다. 중인이던 신분이 양반으로 격상된 것도 이때의 일입니다. 상관인 군수 이은을 끝까지 모셨던 공을 인정받은 덕분입니다. 이로서 이예는 학성 이씨의 시조가 됩니다. 학성은 울산의 옛 지명이니 울산에서 나고 자라 울산에서 뿌리를 내린 이예의 정체성은 가문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 후 이예는 전문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됩니다. 배포가 있어 담력이 큰데다, 오고가며 경험이 풍부한 이예를 조선 조정에서도 주목하게 되어 이를 대일본 외교에 적극 활용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세종대왕은 이예를 외교사절로 보내며 "모르는 사람은 보낼 수 없어서, 이에 그대를 명하여 보내는 것이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외교관으로써 이예의 업적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일본에 외교관으로 파견된 것만 44회에 달합니다. 맡았던 외교업무 또한 다양합니다. 조선과 일본 사이의 외교를 중재했던 대마도의 도주 종정무가 사망했을 때, 이를 위로하기 위해 조선을 대표하여 이예가 파견됩니다. 간단해 보이는 업무이지만, 조선을 대표해 외국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은 노련한 외교관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는 현대의 경우로 미루어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지요.  



 또한 왜구가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노략질을 하고, 우리 백성을 노예로 팔기 위해 잡아갔을 경우도 이예는 파견되었습니다. 이는 두가지 목적입니다. 첫째는 일본정부에 이런 부당한 해적행위에 대한 항위를 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잡혀간 백성들을 다시 찾아 고향으로 송환시킬 목적이지요. 이 또한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한번은 일본 해적들이 조선백성들을 노예로 유구국에 팔아넘긴 일이 있었습니다. 유구국이란 지금의 오키나와를 말합니다. 1416년 1월 오키나와에 파견된 이예는 같은 해 7월, 44명을 데리고 귀국합니다. 장장 6개월에 걸친 왕복 바닷길 여정이였습니다. 



 28세 시작된 외교관 생활은 71세에 끝이 났으니, 44년 외교관 한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분이 쇄환해온 백성의 수만 모두 667명. 타국에서 노예의 삶을 살 백성들에게 다시 삶을 찾아주었으니 외교관의 귀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울산과 이예의 인연은 지금도 이어집니다. 울주군 웅촌면에 있는 석계서원은 이예를 모시고 있는 서원입니다. 현해탄을 오가며 조선의 외교일선에서 분주했던 울산의 외교관을 떠올려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




 



Posted by Tele.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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