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신대기근도 막지 못한 옛 울산의 교육열


 울산 중구 서원 11길에는 구강서원이 있습니다. 서원은 조선시대 옛 교육기관으로 성현에 제사를 모시고, 후학을 가르키는 곳이지요.

 

 울산 중구에는 또한 울산향교가 있는데, 지금으로 비교하면 향교는 공립대학이고, 서원은 사립대학과 비슷한 곳입니다. 성현에 제사를 올리고 선비들을 교육하는 것은 같지만, 설립주체가 다른 까닭에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서원은 향교에 비하면 보다 지역 밀착형 교육기관입니다. 구강서원의 예로 들면, 효종 10년인 서기 1659년 2월 9일에 울산에 사는 선비 배두첨 외 11명이 울산에도 서원을 만들자는 발의를 하게 됩니다.

 

 이를 구강서원 창건발의라고 하는데, 이후에도 3차에 걸친 발의와 논의가 있게 되지요. 울산의 선비들에 의해 만드는 서원인 만큼 지역 선비들의 참여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였습니다. 3차에 걸친 발의는 이를 위한 것이였습니다. 




 최종적으로 서원 건립에 참여하게 된 울산지역 선비는 총 55명입니다. 숙종 4년인 1678년,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말하면, 울산광역시 중구 반구1동 290번지에 구강서원은 창건 됩니다.

 

 최초 발의가 있었던 해가 1659년이고 건립이 1678년이니 무려 19년이 걸린 셈이지요. 역사를 고려하지 않고 본다면, 12명의 발의자가  55명으로 늘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19년은 너무나 더딘 속도입니다. 



 이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1670년인 현종 11년에 조선에 몰아닥친 경신대기근입니다. 현종 재위 11년인 1670년에 시작하여 재위 12년인 1671년에 끝나 약 2년에 걸친 대기근을 말합니다.

 

 경술년에 시작하여 신해년에 끝났다고 해서 경신대기근이라 부르지요. 조선에 기근은 흔한 일이였지만, 경신대기근에 비하면 임진왜란, 병자호란이 더 나았을 것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참혹한 대재앙이였습니다. 



 

  조선왕조 실록의 기록을 보면  우박, 서리, 가뭄과 뒤이은 홍수, 그리고 한번 쓸고 가면 남는게 없다는 메뚜기 떼의 창궐로 전국 8도 어느 한곳 예외가 없는 흉년이 듭니다.

 

 또한 사람에 치명적인 전염병과 소를 죽이는 우역 또한 기승이였지요. 실록에 따르면 1671년 12월, 윤경교가 "이때까지의 사망자가 100만 명을 상회합니다."라고 보고한 기록이 있습니다. 



 구강서원은 이런 악조건 속에서 만들어진 서원입니다. 수많은 생명이 사라져간 대기근의 와중에서도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기관을 만든 선인들의 자세는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1678년인 숙종 4년 마침내 구강서원은 울산의 최초 서원으로 개원하게 됩니다.

 

 16년 후인 숙종 20년 "구강"이라는 편액( 널빤지나 종이·비단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문 위에 거는 액자)을 하사 받게 되었으니, 울산에 교육기관을 만들기 위해 힘쓴 선비들의 노고가 보상 받은 셈입니다.



 서기 1817년인 고종 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열게 되었습니다.

 

  옛날 구강서원을 만들기 위해 울산의 선비들이 창건발의를 했던 것처럼, 울산의 유생들이 구강서원복원추진회를 만들고 복원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로 지난 2003년 3월 13일 현재의 자리에서 다시 서원이 열린 것이지요. 



 서원에도 역사가 있습니다. 그 역사를 관통하는 것은 자식들과 후배들에게 보다 좋은 교육을 시키고 싶다는 부모님들과 선배님들의 희생정신과 강렬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옛 선비들의 지극한 교육열을 엿볼 수 있는 구강서원을 돌아보았습니다.  

 

  조선 최대의 경신대기근도 막지못한 그분들의 교육열은 존경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이런 정신은 지금도 이어져 풍요로운 현재의 우리를 있게 만든 토대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한해를 마감하는 차분한 기분으로 이번 주말 아이와 함께 손 잡고 구강서원을 돌아보는 것은 어떠실까요? ^^












 

Posted by Tele.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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