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묘를 어디에 쓰지."
 돌아가신 아버지의 묏자리를 잡지 못한 아들, 그 마음이 어떨까요? 좋은 곳에 아버지 묘를 쓰려고 작정만 하다가 막상 돌아가실 때까지 정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어요. 고려시대 상개동에 사는 김씨가 바로 그사람이었죠.

 

 어쩔수없이 가묘를 했죠. 좋은 묏자리를 찾아 돌아다녔지만 적당한 곳을 찾기 어려웠어요. 그렇다보니 잠도 제대로 자기 어려웠죠. 어느 날 밤에 머리가 하얀 노인이 나타났어요.

"감나무진 주막집에 가서 머슴을 살아라."
 아버지 장례도 치르지 않고 머슴살이라니요. 그야말로 개꿈이다 싶었어요. 별 희한한 꿈이 다 있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시간만 지날 뿐 묘를 찾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어요.
'머슴이라도 살까, 혹시 무슨 기회라도 있을까.'
 처음에는 느닷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김씨는 노인의 말대로 해보기로 했어요. 감나무진 주막에 찾아가 머슴살이를 하게 됐죠. 막상 시작은 했지만 영문도 모르고 머슴살이라. 언제까지 해야하지, 마음이 여간 복잡하지 않았을 거에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밤이 깊어져 주막 문을 닫으려는데 풍수지리가와 상주가 찾아왔어요. 술을 시킨 두 사람을 머리를 맞대고 소곤거리고 있었죠. 무슨 일인데 저리도 심각하게 이야기를 할까요. 웬일인지 김씨는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죠. 영문도 모르면서 말이지요. 술을 가져다주는 척하면서 이야기를 엿들었었죠.
"이 묏자리가 정말 좋은 곳이요,."
"아주 큰일을 하게 될 자리야. 저녁에 찾아가 보자고."
세상에! 김씨가 그렇게나 찾던 좋은 묏자리가 어디에 있는 모양이었지요. 혹시 꿈에 나타난 노인이 자신을 주막에 보낸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요. 김씨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있었죠. 그 때 풍수가 김씨를 불렀어요.
"달걀을 세 개만 사와."
"달걀이요. 아. 예. 알겠습니다."

 김씨는 그길로 달걀 세개를 사왔죠. 도대체 이 달걀을 무엇에 쓰려는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죠. 밤이 깊어도 두 사람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그들을 지켜보는 일도 지쳐가면서 잠들고 말았어요. 꿈에 다시 백발노인이 나타났어요.
"어서 일어나."
"예! 왜요?."
 김씨가 깜짝 놀라 일어나보니 풍수지리가와 상주가 밖으로 나가는 길이었죠. 조심스럽게 따라갔어요. 도대체 저 사람들은 이 밤에 어디로 가는 걸까요. 혹시 좋은 묏자리라도 찾으로 가는 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죠.

 


 한참 산을 따라 올라갔어요. 어느 지점에 도착하자 풍수지리가가 걸음을 멈췄죠. 그러더니 달걀을 땅에 묻었어요.
"여기니까 잘 기억해 둬요."
"정말 좋은 묏자리가 맞죠. 자손들이 크게 성공할!"
"당연하죠."
 상주는 흡족한 표정이었죠. 김씨는 어떻게든 저곳에 아버지를 모셔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들이 내려갈 때까지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다가 집으로 뛰어 내려갔어요. 조금이라도 늦으면 묘를 훔치지 못할까봐 바로 집으로 돌아갔지요. 바람같이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달걀을 묻은 곳으로 옮겨 모셨어요. 좋은 자리라고 하니 믿어보기로 한 것이었죠. 묏자리의 위력은 나타났을까요.

 풍수의 위력은 대단했어요. 그의 후손들이 고려에서 높은 벼슬을 했고, 대마도로 건너가 대마도주가 되었다고 해요. 이만하면 쓸 만하죠. 이후 김씨의 아버지 묘가 있는 곳을 대마도주등이라고 부르게 됐죠. 마을 이름도 도왕동이라고 하고 말이죠. 이 이름은 임금 왕이 들어간 것을 꺼리면서 성할 왕으로 바꿨다고 해요. 이름은 두왕동 한번 더 바뀌었어요. 울산과 일본의 교류 역사가 묘를 잘써서 성공한 이야기와 엮어 전해 내려오죠.

 

 특이한 점은 김씨가 이웃나라 일본 대마도주가 되었다는 점이지요.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기 어렵지만 말이에요. 울산의 김씨가 대마도의 영주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확실하지는 않다고 해요. 역사적인 사실을 떠나 울산 사람들이 일본과 어떻게 교류했는가를 알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에요. 이런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일본의 대마도와 울산의 교류가 많았다는 이야기니깐요. 


 울산은 맑은 날 높은 산에 오르면 대마도가 보인다고 할 정도로 가깝습니다. 서울이나 대전보다 가깝죠. 가까운 곳에 있으니 나라가 달라도 일본과의 교류가 잦았어요. 


 조선시대 울산에는 정부의 공인을 받은 일본인들이 살았습니다. 왜관이라는 곳을 통해 말이죠. 울산의 염포는 부산포, 내이포와 함께 왜관으로 지정됐어요. 염포는 1426년인 세종 8년에 개항되었죠. 염포는 다른 두 지역보다 조금 늦게 왜관이 되었지만 많은 일본이 거주했어요. 왜관 안에 거주하는 일본인들과의 교류도 상당히 활발했었죠. 총칼을 들고 일본인과 맞선 장면만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상당히 흥미롭게 느껴지는 내용이죠.

 

 전쟁의 역사만 알고 있는 입장에는 생활, 문화 교류사가 생경하게 다가와요. 일본을 경계했지만 상생하려는 시도도 했던 것이죠.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면 묘만 잘 쓰면 국가를 초월한 성공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에요. 충수에 대한 선인들의 가치관을 잘 알 수 있는 소중한 이야기인듯 합니다.

 

 

 

 

Posted by 울산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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