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여행]조상들의 발자취 - 학성이씨 ‘근재공 고택, 이휴정’
즐기 GO/낭만여행2011. 8. 26. 15:48

  지난 6월, 학성이씨 월진문회(회장 이채관)가 선조의 묘에서 출토돼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옷과 장식품 등을 울산박물관에 기증했던 사례가 있었죠. 기증품은 조선 중기 봉직랑(종5품 문관)을 지낸 이천기(1610∼1666)와 부인 흥려 박씨의 합장묘에서 지난 1969년 출토된 광다회대(廣多繪帶.조선시대 남성이 두르던 띠)와 면포, 명주 솜모자, 면포 솜옷, 면포 솜버선 등으로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37호로 지정되었었는데요. 또한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던 조선시대 학자 서거정(1420∼1488)이 썼다고 전하는 영남3대 누각 중 하나인 '태화루'의 현판을 함께 기증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귀중한 자료를 기증한 학성이씨 월진문회에 울산시는 감사패를 수여했습니다.

 http://blog.ulsan.go.kr/188



 신라시대 맹활약을 한 학성이씨는 고려말에 새왕조가 들어서자 현재의 울산에 터를 잡았는데요. 그리하여 현재 울산에는 학성이씨의 근재공 고택 및 이휴정 자리하고 있답니다. 역사적으로도 아주 소중한 유적지가 되고 있는 학성이씨의 근재공 고택. 옛조상들의 발자취를 따라 학성이씨에 대해 알아보고 울산누리와 함께 고택을 둘러볼까요?



이예를 시조로 하고 이직강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남도 양산시 세거 성씨입니다.



 <유래>

시조 이예(李藝)는 고려말에 새왕조가 들어서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낙향, 지금의 울산에 터를 잡아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지내옵니다. 그러나 20여년이 지나 세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그는 생각을 고쳤죠.

당시 울산은 왜구의 침입을 자주 받아 민심이 흉흉하고 백성들의 괴로움이 컸습니다. 이웃의 괴로움을 덜고자 통신사로 나선 그는 왜와의 40여 차례에 걸친 왕래외교에서 맹활약했습니다. 그 공으로 세종 3년 조정으로부터 충숙공의 시호와 함께 공패를 하사받았습니다. 그는 또한 무기개발에도 업적을 남긴 발명가였으나 벼슬보다 선비로서 조용히 살 것을 후손들에게 유언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문의번영>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6의사를 배출해 충의의 가문으로 더욱 빛납니다. 이경연(李景淵)은 임진왜란이 나자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정유재란 때는 곽재우와 함께 경남 창녕의 화왕산성 전투에 참가 큰 공을 세워 경성판관에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이인상(李仁常) 역시 향리에서 의병을 일으켜 수많은 전투에서 왜적과 분전하여 공을 세우고 도산싸움에서 장렬히 전사했으며, 이겸수(李謙受), 이겸익(李謙益)형제는 당시 서생포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의 정세탐정에 큰 공을 거두었습니다. 이겸수는 정주판관을 제수받았고, 이겸익은 현종 때 한성부 우윤(右尹)을 지냈습니다. 이봉수(李鳳壽)는 빛나는 전공을 세우고 진중에서 순국하여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으로 녹봉되기도 합니다. 조선 현종때의 대문장가 이동영은 국난에 전공을 세워 관직을 받고도 이를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자연과 함께 노닐었던 할아버지 이한남의 뜻을 기려 현종 3년 봄 태화 강변에 이휴정을 지었습니다.

학성이씨는 이외에도 이양오(李養吾), 이관오(李觀吾)형제와 이준민(李俊民)같은 문장가들을 배출하여 가문의 명성을 이어왔습니다.

 <계 파>

-곡강파(曲江派)
-농소파(農所派)
-봉사공파(奉社公派)
-월진파(越津派)
-현령공파(縣令公派)


 학성 이씨파 종가집으로 시조인 이예(李藝)의 11손 이의창(李宜昌)이 지었습니다. 고종 때 이의창의 증손인 이장찬이 고쳐 지었고 1934년경 다시 전체적으로 고쳐 지었는데, 이후로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는 곳입니다.

석천마을 한 가운데 자리잡은 이 집은 문간채, 사랑채, 곳간채, 별당채, 안채 등과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갖추고 있습니다. 문간채는 대문에 딸린 건물이고 사랑채는 작은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입니다. 생활공간을 나눈 영역 분리가 명료하고 독립된 사당을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상류층 종가의 면모를 보여 주는 집입니다.


경남 울산시 신정동. 시조의 8대손 이한남(李翰南)이 태화강을 건너와 신정동에 살기 시작한것이 계기가 돼 손자 이동영(李東英)이 정자를 지어 이미정(二美亭)이라했습니다. 물 좋고 산 좋기가 중국 금릉 황강루에 비할만하다고 해서 이름을 붙였으나 그곳을 지나던 암행어사 박세연(朴世衍)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유유자적하고 세상의 공명을 구하지 말고 산에 쉬고 물에 쉬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이휴정(二休亭)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문루였던 당시에는 중층의 누각으로 아래층은 출입이 이루어지고 2층은 개방된 마루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1층이 낮아져서 출입이 안되고, 2층은 중앙에 대청을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시설한 모습으로 변하여 문루(門樓)형식에서 정자형식으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기둥 간격이 넓고 굵직한 부재를 사용한 초익공 팔작 지붕만이 조선 후기 문루의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2003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2005년 복원했습니다.

 

 - 출처 : 울산문화관광

  • 메모리얼 2013.01.31 01:30

    이예 선생에 대한 내용은 오개념을 심어줄 것 같습니다. 사료(실록 등)를 바탕으로 서술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