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왜성의 삼지환


평화로운 공원에서 정유재란의 흔적을 찾아보다.


 현재 학성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울산시민의 평화로운 휴식처가 되고 있는 곳이 조선시대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격전지였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 분은 많지 않습니다. 이번 여름, 또 다른 천만관객을 동원할 영화로 '명량'이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임진왜란이 벌어진지 5년째, 이 영화에서 잘 묘사된 것처럼 이순신 장군과 조선수군의 명량에서의 분전으로 왜군은 남해안을 돌아가는 수군보급로를 확보하는데 실패합니다. 


 


▲ 삼지환, 이지환, 본환은 일본식 성 구조를 말함. 3개로 나뉜 공간이 요새화


 지금까지의 전략을 바꿔서 왜군은 울산에서 순천까지 여러 전략적 요충지에 왜성을 쌓고 농성을 하게 됩니다. 조선은 항전하는 왜군을 남해안에서 몰아내기로 결의하고, 그 1차 목표는 울산왜성이 됩니다. 바로 지금의 학성공원이지요. 



▲ 울산왜성의 이지환


 1598년 1월 29일 (음력 1597년 12월 23일), 권율 장군과 명나라 부총병 양호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 1만 1500명, 명나라군 3만 6000명, 총병력 4만 7500명의 조명 연합군은 울산성을 향해 진군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울산성 전투입니다. 



  울산성을 수비하는 왜군은 가등청정으로 알려져 있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총 1만 6천명의 군세, 20일 남짓한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의 전사자는 총 1만 6000명, 왜군은 1만 5500명 전사자를 냈다고 하니 그 치열한 전투를 짐작하게 합니다. 

 


▲ 울산왜성의 본환


 울산왜성이 위치한 곳은 태화강이 내려다보이는 평야 한가운데 낮은 언덕입니다. 태화강을 통해 동해바다로 빠질 수도 있으며, 배를 통한 보급도 가능하니, 전략적 가치야 이루 말할 수 없지요. 당시 울산왜성은 울산읍성을 함락하면서 그 읍성에 쓰였던 돌들로 쌓았고, 축성의 달인이라 불리는 가토 기요마사가 쌓아 말 그대로 “난공불락”의 성이였습니다. 



 초기 강공으로 나섰다 울산왜성에서 낭패를 본 조,명 연합군은 물길을 끊는 장기전으로 돌입합니다. 급히 쌓은 울산왜성의 유일한 약점이 있었다면, 성내에 우물이 없어서 식수 확보가 어려웠다는 점입니다. 왜군의 보급을 끊은 조,명 연합군은 또 다시 공세에 나서 울산성 외성을 함락합니다. 



  적의 총대장 가토 기요마사를 일본식 자살인 할복을 각오하게 할 정도로 몰아붙이는데 성공하지만, 구원에 나선 8만명의 왜군이 몰려들자 공성포기와 퇴각을 결정하게 됩니다. 이로서 20일간의 치열했던 울산성 전투는 막을 내리게 되지요. 



▲ 태화강이 바라보이는 평야지대의 유일한 언덕, 왜군이 이곳에 주목한 것은 이곳의 전략적 가치 때문


 아쉽게 조,명 연합군이 물러섰지만, 제1차 울산성 전투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1598년 10월 21일 (음력 1598년 9월 22일)나선 김응서 장군과 명나라 마귀 제독이 나섰던 제2차 울산성 전투에서 결국 가토 기요마사를 울산성에서 물러나게 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평화로운 학성공원에 이처럼 치열했던 전투가 벌어졌다니 믿기 힘듭니다. 하기야 420여년 전 일이고, 그때의 난공불락의 울산왜성도 군데군데 무너져 이끼가 무성합니다. 뽕나무 밭이 변해 바다가 된다는 옛 속담이 떠오릅니다.  평화로운 이 곳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숭고한 생명을 희생한 옛 선조들의 얼이 서린 곳입니다. 지금의 평화 또한  옛날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죠. 영화 "명량"이 화제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리더쉽과 조선수군 뿐 아니라 이곳 울산에서 피를 흘렸던  무명의 선조들의 희생 또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Posted by Tele.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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