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의설화#4]정도전의 벗이었던 정몽주의 유배지
즐기 GO/울산웹툰2014. 5. 26. 17:38

요즘 KBS에서 인기리에 방영중인 '정도전' 즐겨 보시나요?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격동의 시기에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꿈꾸던 성리학적 이상세계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끝내는 정적의 칼에 단죄되어 조선 왕조의 끝자락에 가서야 겨우 신원 되는 극단적인 삶을 살았죠.

 고려시대에 정도전의 절친으로 지낸 인물 중 한 사람이 있는데요. 바로 고려 말 충신이었던 정몽주(鄭夢周, 1337~1392)입니다.

정몽주는 이후 정도전에게 많은 영향을 주며 '마음을 같이한 벗'의 맹세를 나누었으나, 역사의 선택 앞에서 둘은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끝까지 충신의 길을 걸었던 정몽주는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자신들과 함께 가고자 설득을 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자신들과 뜻을 함께하지 않겠느냐는 물었지만 정몽주는 단호한 자신의 마음을 답가로 들려주었습니다.

그 답가가 바로 '단심가'인데요. 지금까지도 충성심을 대표하는 시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렇듯 한 시대의 유명한 인물이었던 '정몽주'

그도 유배를 왔던 사건이 있었는데요. 그 유배지가 바로 울산의 요도입니다. 울산의 설화로 전해지고 있는 정몽주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임금이 있던 시절에 가장 큰 죄는 임금의 뜻에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정치적인 이유, 즉 숙적을 제거하려는 방법으로 유배를 선택하기도 했다고 하지요. 유배지가 보통 중앙 정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좋은 방법이었거든요.

그렇다면 정몽주의 유배지인 요도는 어떤 곳이었을까요.

'섬 도()'자가 있으니 바다에 있는 섬이겠네요. 고려 시대의 수도인 개성에서 멀리 떨어진 남해부터 훑어봐야겠어요. 동해, 서해, 제주도까지 다 봐도 찾을 수가 없어요.

요도라는 지명에서 약간의 오해가 있을수도 있는데요. 요도는 지금의 언양 어음입니다.

이 이름은 감천과 남천이 합류하는 이수지간인 지형으로 생긴 것이에요. 두 물줄기의 중간에 섬처럼 있다고 해서 말이에요.

자, 하늘에서 어음을 한번 내려다 볼까요. 형세가 배 떠내려가는 모양과 같아서 풍수지리적으로 행주혈이라고 한대요. 배가 떠다니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이 있어야겠죠. 그래서 언양 어음에는 우물을 되도록 파지 않았다고 하네요. 풍수적인 이유 때문에 항상 물을 귀하게 여겼을 당시의 풍경이 그려지네요.

잠시,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신라시대에는 대신들이 어음에 많이 거주했다고 하네요. 지리적으로 당시 수도였던 경주에서 멀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지금의 수도권 정도가 되겠죠.

그런데 고려 시대가 되면서 요도는 변방이 돼 버렸어요. 수도인 개성에서 무려 천 리나 되는 길이었거든요. 그래서 적소, 즉 귀양살이하는 곳이 되었죠.

요도로 유배 왔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포은 정몽주입니다.

그는 고려 말엽인 우왕 원년인 375년에 요도로 유배와 우왕 3년 3월까지 살았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명 유배지로는 다산서당이 있는 강진, 보길도가 있는 해남, 그리고 삼수갑산이라고 불리는 함경남도 북서, 북동쪽이 있어요. 그 중에서 삼수갑산은 험한 오지라는 점, 매우 추운 지역이어서 예전부터 중죄인을 귀양 보내는 적소로 손꼽혔죠. 이 지역으로 한번 귀양을 가면 다시 살아 돌아오기 어려웠어요. 정몽주는 고향이 경북 영천이니 그리 가혹한 유배지로 보내진 것은 아닌 셈이지요.

이들 유배지에 비하면 요도는 어땠을까요. 지리적으로는 수도에서 멀지만 꽤 살기 좋은 곳이 아니었을까요. 요도는 사통팔달 교통 요지이면서 조금만 들어가면 깊은 산과 계곡을 가지고 있는 곳이지요. 요도에는 지금은 찾아볼 수 없지만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다고 헤요.

정몽주는 반구대, 작천정 등지의 풍광에 매료돼 꽤 여러 편의 글을 남겼죠.

천혜의 정경을 즐기며 귀양살이의 한을 달랬지요. 이 한은 시로 고스란히 전해져 내려오고 있죠.

정몽주의 한 마저도 소중한 문학 작품이 된 셈이지요. 반구대 경치를 찾아온 선비들과 문학과 인생을 이야기하기에 좋았겠지요. 당시 그는 몰랐겠지만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를 배경으로 하면서 말이죠. 그뿐인가요. 작괘천의 아름다운 계속과 너름 바위, 달빛도 유배지의 한을 달래기에 충분했을 거에요.

이야기를 하다보니 유배지가 아닌 여행지를 소개를 하는 듯 하지 않나요. 정치적 위상과 교환할 만한 가치가 충분한 멋진 풍경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유배의 다른 이름은 휴식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요도 같은 지역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죠. 그뿐만 아니라 이들이 남긴 수많은 시문, 울산 지역 사람들과의 교류는 울산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거에요. 이들이 울산에 불어넣은 기운은 신선함 그 자체였죠.

정몽주 외에도 남곡 권해는 조선 숙종 12년인 1686년에 언양으로 유배를 왔어요.

이곳에서 <춘추인씨지>를 저술했죠. 그뿐만 아니라 유배를 온 학자들을 쫓아온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하지요. 박민효가 대표적인 사람이에요. 권해를 따라온 박민효는 울산 최초의 읍지인 <학성지> 편찬에 참여했죠. 그 외 많은 이들이 울산을 다녀갔지요. 유배당한 사람에게는 고역이엤지만 그들을 맞이한 울산으로서는 행운과 같은 일이라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