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동해 바닷가의 물 가운데에 묻어라.'

 681 1월 문무왕이 남긴 유언이었어요. 경주의 번듯한 묏자리를 두고 왜 하필 바다에 자신을 묻으라고 하는 걸까요. 아들로서 이 말을 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되었지만 신왕은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지요.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은 일본의 잦은 침략때문에 걱정이 많았기 때문에 죽어서라도 통일신라의 평화를 지키겠다는 뜻으로 바다에 묻어달라고 했어요. 신왕을 비롯한 신하들은 동해 어귀에 문무왕을 묻었어요. 그 후 문무왕은 동해를 지키는 용이 되었다고 해요. 그 해 신왕은 두 번의 장례를 치러야 했어요. 어머니인 자의왕후도 같은 해 세상을 떠났거든요. 

 

 

자의왕후도 남편의 뒤를 따라 동해의 용이 될 되었대요. 왕비는 왕과 같은 장소를 택할 수는 없었나봐요. 경주 바다에서 아래쪽인 울산의 일산에 자리를 찾은 것을 보면 말이죠.

 하지만 자의왕후는 용으로 제대로 날지 못했나 봐요. 하늘로 승천하기 위해 날다가 바위에 떨어져 죽어버렸거든요.

 

그래서 바위는 지금도 자의왕후의 피로 붉은색을 띤대요. 

이 바위는 대왕바위로 불리다가 댕바위라고 부르지요. 분명한 것은 문무왕과 자의왕후가 동해를 지키고 있단 점이죠.

 울산은 언제나 일본의 침입을 걱정해야 하는 지역이었어요. 일본에서 가까운 울산은 언제든 침입하기 좋은 장소였어요. 그래서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최전방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어요.

경상도에는 경상좌병영, 경상우병영이 있었죠 경상좌병영은 태종 15년 경주 동남방 20리인 토을마리에 있다가 태종 17년 울산으로 옮겨 왔고요. 좌병영을 새로 옮겨왔으니 성이 필요했겠죠. 후보지는 동대산 자락의 기박산성이었어요. 경상좌병영을 울산으로 옮겨온 이유도 침략해오는 일본인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였으니 문제 될 것이 없었지요.

 

 이곳에 좌병영을 설치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죠. 지시가 내려지자마자 성 정비에 들어갔어요. 기를 꽂아두고 돌을 쌓아 올렸어요. 그런데 호드락 바람, 즉 회오리바람이 불어서 기가 자꾸만 날아가 버렸죠. 남쪽으로 남쪽으로 기가 날려갔어요. 한 두번도 아니고 말이죠이것은 무슨 일 일까요. 군사들의 궁금증은 날이 갈수록 커졌죠. 공사를 중단하고 기가 가는 곳을 따라가 보았어요꼭 이쪽으로 따라오라고 하는 것 같았어요. 그곳이 바로 병영이었어요. 기박산성보다 훨씬 좋은 곳이었어요. 호드락 바람에 기가 날아간 것은 하늘의 계시라고 생각했죠.

 

 신의 계시를 이어받아 둘레 3723,높이 12척의 병영성을 지었죠. 경상좌병영이 울산에 설치되면서 안보의 중요성이 커졌어요. 그런데도 좌병영의 이동문제로 논란은 끊이지 않았죠.

  '좌병영의 진을 울산에 설치한 것은 애당초 여러 섬의 왜인이 번갈아 나와 노략질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 것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육군의 장수가 한쪽 모퉁이에 있다가 앉아서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되니, 영천으로 옮겨 설치하는 것만 못하다.'

  울산이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점이 문제였던 거죠. 이러한 논란은 이후에도 지속되었어요. 울산을 대체할 지역은 영천이었죠. 하지만 선뜻 결정하기란 쉽지 않았어요. 동해가 무너지면 내륙까지 무너지기 십상이죠.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울산이 큰 고초를 치렀던 이유도 이 때문이죠.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죠.

 

 

 

 

'앞으로!','앞으로!'

우리가 사는 이곳, 울산에서 한··일 세 나라가 치열한 전쟁을 벌였어요. 1597년에서 1598년까지 일어난 정유재란 때였어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조명연합군이 결성됐죠. 1597 1차 전투는 도산성에서 있었어요.

조명연합국의 10만 대군이 목숨 바쳐 싸웠지만 도산성을 지키고 있던 일본군을 무너뜨리지 못했어요. 일본군이 4겹의 철벽 수비를 하니 도저히 뚫을 수가 없었지요. 조명연합군의 장수 이방춘은 이 사실에 분개해 말에 올라탔어요. 그러니 다른 장수 30여명도 그 뒤를 따랐어요. 그는 태화강을 건너 일본군이 울산에 만든 또 다른 성을 공격할 참이었어요. 서생포왜성이 바로 그 성이죠. 서생포왜성에 도착했지만 밤이 깊어지기만 기다려야 했어요. 드디어 밤이 깊어지고 달이 훤하게 떠오르자 급습을 했죠. 일본군은 놀라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지만 막강한 군사력을 가졌기 때문에 곧 반격을 시작했어요.  

 반격이 심해지자 이방춘은 군사를 피해 급히 도망쳐야만 했어요. 열심히 도망쳤지만 일본의 군사들만큼 빠르진 않았죠. 이들을 쫓아온 일본 군사와 서생면 화정리 회야강 하류 꿀다리 앞에서 만나게 됐죠. 고작 30명인 명나라 장수와 비교하면 일본군의 수는 엄청났어요. 당황하는 이방춘 장군 앞에 한 조선인 장수가 다가왔어요. 두사람이 뭔가를 이야기하더니 바로 꿀다리를 해체하기 시작했죠. 서서히 꿀다리가 무너지기 시작했죠. 그 때문에 수백 명의 일본군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해요. 꿀다리는 먼저 건드리는 쪽이 승리한다고 한다고 해서 그 후 회야강을 일승강이라고 불렀다고 해요 

 울산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죠. 지금은 아름다운 바다를 가진 관광지이자 수출할 물건을 실은 배들이 오가는 지역으로 바뀌었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평화가 고맙게 느껴지는 이야기네요. 평화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어요.

 

 

 울산설화 속 병영성은?

 

울산 병영성은 ?

병영성은 조선 태조6(1397)에 진이 설치되고, 조선 태종 15(1415) 경주에서 현재의 병영성 자리에 좌도병마도절제사영이 이전된 후 태종 17(1417)에 석성으로 축조되었습니다. 그 후 세종 8(1426)에는 울산 병영이 경상좌도 병영인 창원 합포의 우도내상성과 일시 합치되면서 지금의 병영성을 잠시 비워두었으나 선조 37(1604) 다시 이곳으로 병영을 이전, 철종 10(1859)에 남문외성이 축성되는 등 조선시대 말까지 사용되었던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였죠.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울산왜성을 축조하면서 병영성 성벽의 성돌을 옮겨갔고, 또 해방이후 성터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성터는 경작지로 개간되었으며, 대단위 아파트와 주택이 밀집되면서 성은 훼손되었다. 뿐만 아니라 도시개발에 밀려 도심지역에 입지한 병영성은 개발을 제한하는 장애요인으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병영성은 조선시대 지방군 최고의 군사지휘기관이며 군사요충지로 외침을 막고 국토를 지키려고 했던 고달픈 삶을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항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입니다.

 

병영성 관련 울산 역사 칼럼

http://blog.ulsan.go.kr/1925

 

 

Posted by 울산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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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준혁 2019.05.14 11: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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