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죠.”

 

 한 남자가 무덤 앞에서 애통한 어조로 말을 합니다. 이 남자는 울주군 두서면 전읍리에 사는 이의립(李義立)이라고 하는데요. 남자가 한탄한 무덤은 바로 그의 부모님 묘 입니다. 이렇게 한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의립은 어려서부터 까마귀를 보며 부모님께 효를 다하리라 맹세했지만 이의립이 미처 크기도 전에 돌아가신 부모님께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무덤 앞에서 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의립은 한참을 울다 깊은 생각에 잠깁니다.

임금은 만백성의 어버이니, 부모님을 대신하여 나라에 충성하자.’

 

 이의립은 돌아가신 부모님 대신 나라에 충성하는 방법을 찾기로 합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임진왜란으로 백성의 상처가 깊었던 때였습니다. 때문에 이의립은 더욱 깊은 고민에 빠졌지요.

 

 몇 달 동안 고민한 그의 결론은 바로 쇠를 찾는 것입니다. 갑자기 왠 쇠를 찾는 일이냐구요?

 

 임진왜란 때 치욕을 당한 이유는 바로무기가 부족해서였는데, 쇠로 무기를 만들면 나라의 군사력을 강하게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농사짓는 농기구도 만들 수 있어 백성들의 생활도 윤택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의립은 미친 듯이 쇠를 찾아 전국 팔도를 돌아다녔습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지만 이의립에게 십 년은 하루와 같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의립이 부모가 죽고난 충격 때문에 미쳤다고 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쇠를 찾는 일에만 몰두하였습니다.

 

 이렇게 쇠를 찾아 다니면서도 이의립에게 더 중요한 날이 다가왔습니다. 바로 부모님의 기일입니다. 그날만큼은 쇠를 찾는 일을 잠시 중단하고 고향을 찾았습니다. 함경도에서 쇠를 찾던 이의립은 기일에 맞춰 고향으로 돌아가려니 발걸음을 바삐 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날이 저물고 비가오기 시작해 고향을 지척에 둔 경주 외동 입실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이의립은 깊은 단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노인이 나타나 이의립의 머리를 지팡이로 툭툭 치며 이놈아, 십 년을 기다린 일이 바로 문밖에 있는데 잠이 오느냐.” 라고 말했습니다. 이의립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서 노인의 모습을 살폈으나 노인의 모습은 오간 데 없었습니다.

 

 다시 잠을 청하는 이의립은 밖에서 들리는 까치소리에 무언가 이끌린 듯 마당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까치가 따라오기라도 하라듯 이의립의 앞에서 빙빙 돌고 있었습니다. 이의립은 문뜩 자신이 꾼 꿈을 생각하다가 급히 까치를 쫓아갔습니다.

 

 

 

 

 까치는 날짐승이라 이의립은 까치를 쫓는데 점점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까치가 멈춰 한 곳을 빙빙 돌고 있어 이의립은 힘이든 나머지 털썩 주저앉는데 손에 느껴지는 흙이 다른 흙과는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의립은 힘든 것도 잊고 그 흙들이 흘러나온 곳을 찾았습니다.

 

 산 중턱에 도착했을 때 이의립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습니다. 산사태로 무너진 흙더미 사이로 까만 바위가 보였습니다. 바로 이의립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철산 이었습니다. 후 그 지역은 달천지역이어서 이의립이 찾은 산을 달천광산이라고 하였습니다.

 

 여하튼 그의 바램 대로 그의 십 년간의 노력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데 일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임금께서는 이의립에게 충을 구한다는 뜻의 구충당(求忠當)’이라는 호를 하사하였고, 그 후에도 이의립은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다하지 못한 효를 대신하여, 충을 실현하기 위해 쇠를 단련하는 기술을 배웠습니다.

 

 까마귀를 보며 효도를 결심하고 까치 덕분에 광산을 발견한 이의립은 부모님께 못다한 효를 임금을 향한 충으로 대신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 효와 충은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달천 철장 : 시 지정기념물 제40호>

 

 

 

 

 울산설화 속 이의립은 역사 속 실존인물?

 

 이의립 선생 1621년 울주군 두서면 전읍리에서 태어났고, 이의립 사후에 자손들이 만든구충당 문집을 보면 아버지 3년 상을 마친 그는 어느날 생각하기를자식으로서 뜻을 세우지 못하면 사람이라 할 수 없고, 나라가 위난을 당해 어려운데 백성으로서 순국의 정성을 다하지 아니하면 어찌 신하라 하겠는가. 이미 양친이 다 세상을 떠났으니 어버이 섬기는 마음으로 나라에 충성하리라. 지금 나라의 어려움에는 군사와 농사가 막중하지만 화약을 만들 수 있는 유황과 농기구와 솥을 만들 수 있는 무쇠가 생산되지 않고 있어 내 이를 찾아 나라의 어려움에 보국하리라라면서 치술령에 올라 기도 후 지리산, 가야산, 금강산, 묘향산까지 삼천리 산천을 14년 동안 뒤지면서 쇠를 찾았는데요. 

 

 그가 38세 되던 해 드디어 울산 달천땅에서 옛날부터 캐오다 폐광이 된 토철광산을 발견하게 되었죠. 그는 여기에서 2년 동안 토철을 용해하는 제련법을 연구하여 판장쇠를 생산하기에 이르렀고 이 판장쇠로 함석 100, 선철 1000, 주철환 73만개 솥 440좌 외에도 많은 철제품을 만들어 나라의 후련도감에 자진해 바치기도 했습니다. 또한 유황을 만호봉이라는 곳에서 발견하여 나라에 바치니 현종 임금은 평안서도의 숙천도호부사 벼슬을 내렸으나 극구 사양하여 이의립의 아버지, 아들 등 3대에 걸쳐 가선대부의 위계와 함께 달천광산을 하사했습니다.

 

 이때부터 달천광산에서 채굴한 원료로 무쇠 부질을 사기업적으로 경영했고, 달천철장은 그의 자손들에게 237년간 승계되어 오다가 13세손 이은건에 이르러 1908년 통감부에서 공포한 한국광산법에 의해 일본인에게 약탈당하였습니다. 그후 달천철장은 삼미광업 울산광업소로 바뀌었고 토철이 바닥나서 수천년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Posted by 울산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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