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예는 무엇 때문에 바다를 건넜을까?

 1373년 고려말 울주군 말응정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이예(李藝), 호는 학파(鶴坡)라 불렀다. 이예의 선대는 어지러운 정세 속에 휘말려 향리로 강등되었고, 이예 역시 이은 사건에 휘말리기 전까진 지방의 관리로 일하였다. 조선전기는 왜구의 잦은 출몰에 나라가 조용할 날이 없었다. 1397년 울주 군수 이은이 왜구들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때 이은을 모셨던 이예는 자진하여 뒤 따라 갔고, 무사히 돌아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예는 태종 10년까지 매년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었고, 포로 500여명을 돌아오게 한 공으로 호군(護軍)이 되었다.

 1419년 중군병마부수로 대마도정벌에 참여하여 자손의 역을 면해주는 공패(功牌)를 하사받았다. 1443년 71세의 고령임에도 자청하여 대마도체찰사가 되었고, 왜적을 추적해온 공으로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이예는 지방 관리의 신분으로 외교적인 능력을 인정받아 종2품에 올라 학성을 본관으로 하는 학성이씨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이예는 73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40여 차례 걸쳐 일본으로 건너갔다. 사행의 성과에서 가장 특기할 만 한 것으로서 포로송환을 들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졸기에 보면 태종대에 모두 13회에 걸쳐 조선의 사신으로 일본 등지를 왕래하면서 667여명의 포로를 송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의 외교관으로서 마지막 사행의 임무도 포로 송환이었다. 그는 스스로 대마도를 잘 알기에 구석구석을 돌며 사람들에게 물어 모두 데려오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71세의 나이에 다시 바다를 건너기가 쉽지 않음에도 스스로 나가길 원했고, 마지막 사명으로 제주공선을 약탈한 왜구 12명을 잡고, 포로 7명을 송환한 공을 세웠다.

 이예가 40여차례 일본국 사신으로 떠났을 때 바닷길은 왕복 1년이 걸리는 먼 길이었다. 이예는 실제로 1408년 해상에서 폭풍을 만나 표류하여 사경을 헤매다 일본 귀족의 도움으로 살아난 적이 있었고, 1432년 회례사 정사로의 파견에서는 세토나이카이 해안에서 해적에게 피습을 당하기도 하였다. 외교관으로서의 사명감이 없다면 실로 이 험난하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길을 40여회나 나서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가 포로송환에 목숨을 걸고 바닷길로 나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조선왕조실록에는 공이 있는 신하가 죽었을 때 그의 일생과 업적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그 기록을 졸기라 하며 이예의 졸기는 1445년 세종 27년의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졸기편에는 이러한 기록이 남아있다.

세종 27년(1445) 2월 23일 기사

, 藝八歲, 母爲倭所虜

歲庚辰, 請于朝, 隨回禮使尹銘入日本三島覓母, 家搜戶索, 卒不得

회례사(回禮使) 당초에 예가 8세때 모친이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었는데,

경진년, 조정에 청하여 윤명(尹銘)을 따라서 일본의 삼도(三島)에 들어가서 어머니를 찾았는데,

집집마다 수색하였으나 마침내 찾지 못하였다.

 이예가 8세 때 울산에 왜구가 침략하여 어머니를 잡아갔다. 이후 이은 사건으로 대마도에 처음으로 발을 딛게 된다. 성공적으로 돌아오면서 일본으로 끌려갔던 어머니를 다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희망을 품었을 것이다. 이에, 1400년 윤명이 회례사로 대마도 부근 일기도로 파견되었을 때 수행원 신분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윤명이 감금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대신하여 임금의 명을 수행하였다. 외교관으로서의 첫 임무를 가지고 임하면서도 어머니를 찾겠다는 의지로 대마도의 섬들을 뒤졌다. 배를 타고 낯선 섬들을 옮겨 다니며 어머니를 찾아다닌 이예를 생각하면 그의 효심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20년 동안 헤어져있으면서도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고 살아왔던 것이다. 결국 어머니를 찾지 못하였지만 이때 수행했던 지좌전(志佐殿)과의 외교업무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서 외교실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비록 어머니를 찾을 수 없었지만 대마도로 끌려간 포로들의 실상을 보고 스스로 할 일을 찾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편안하게 삶을 안주할 수 있었지만 그는 운명적인 사명감으로 바닷길을 40여 회나 건너게 된다. 어머니를 그리는 효심과 백성을 생각하는 인정이 그를 바닷길로 떠나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닐까한다.

 가족과 단절되고 개인적인 이익만을 쫓는 현대인들에게 이예는 그의 업적을 떠나 스스로를 돌이켜보게 하는 위인일 것이다.

 

 

 

Posted by 울산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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