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는 <살인자의 기억법> 책 말미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작가 지망생 시절 내내 재떨이를 비워주신 아버님에게 이 소설을 바치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들과는 달리 매일 일찍 일어나 집 안팎을 돌보시면서도 어지러운 아들 책상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없이 무던히 참아내셨던 아버지는 '누가 아침마다 내 책상만 치워줘도 꽤 괜찮은 작가가 될텐데'라는 아들의 투덜거리는 소리를 듣고 매일 재떨이를 비워주셨답니다. 지금은 비록 투병 중이시지만 그렇게 아무 말씀없이 믿어주시는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에 김영하라는 작가가 이렇게 탄탄하고 담대한 작품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8월 추천도서] 김영하 - 살인자의 기억법/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이번에 소개하려는 <살인자의 기억법>은 작가의 이름보다는 제목에 끌려서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살인자가 기억하고 싶어하는 것이 무얼까. 더군다나 알츠하이머에 걸린 살인자라니. 설정만 듣고도 귀가 쫑긋해지고 심장이 간질간질했습니다. 더구나 김영하라니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저자
김영하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0-07-3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유쾌한 이야기꾼 김영하의 첫 장편소설!1995년 계간지 '리뷰'...
가격비교

 

 김영하는 1996년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작품으로 제1회 문학동네 작가상(그 당시에는 신인작가상이었답니다)을 수상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김영하는 이 소설을 구상할 당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어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다른 사람의 자살을 도와주는 인물을 떠올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라면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말은 프랑수아즈 사강이라는 프랑스의 유명한 작가의 말입니다. 마약 복용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뒤 그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이 소설의 화자는 자살안내자 혹은 소설가입니다. 자살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그들 속의 자살본능을 이끌어내고 가장 행복하게 자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또 그것을 소설로 완성해가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자체가 충격적이고 보통 사람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만 같지만 진솔한 소통이 사라져가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가슴 한 구석을 묘하게 자극하는 소설이었습니다. 이 소설이 현재까지도 꾸준히 팔리고 있고 여러 나라에도 번역 출간되고 있다는 사실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살인자의 기억법

저자
김영하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3-07-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정교하게 다듬어진 공포의 기록!김영하의 장편소설 『살인자의 기억...
가격비교

 최근 출판된 <살인자의 기억법> 속의 주인공도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화자처럼 다른 사람들을 죽음으로 인도합니다. 다른 점은 <살인자의 기억법> 속의 주인공은 상대와 아무런 대화나 이해 없이 '다음에는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아쉬움 때문에 계속 살인을 저지른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더 잘하기 해서 완벽한 쾌감을 얻기 위해 그는 살인일지를 씁니다. 완벽한 복기를 원하지만 문장을 쓰는 것이 너무 어려워 시를 배우기도 합니다. 살인에 관한 그의 시를 보고 강사가 훌륭한 메타포라고 칭찬하자 이 유식하고 무서운 살인자는 속으로 '미안하지만 그것들은 비유가 아니었네, 이 사람아'라는 섬뜩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되뇌입니다. 그렇게 완벽하게 살인을 하고 시신을 자신의 앞마당에 혹은 자신 소유의 대숲에 묻어둡니다. 그런 그가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친 후 '다음에 더 잘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사라져' 살인을 멈추게 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마지막 희생자가 부탁한 아이를 키우며 남은 인생을 평화롭게 살다가 덜컥 치매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살인자는 치매를 겪으며 스스로 '치매환자로 산다는 것은 날짜를 잘못 알고 하루 일찍 공항에 도착한 여행자와 같은 것이다..(중략).. 그는 영원히 '제때'에 도착하지 못한 채 공항주변을 배회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아무 고통없이 망각의 상태로 들어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리게 될 연쇄살인범에게 세상은 뭐라고 할까' 자문하기도 합니다.

<살인자의 기억법> 속의 문장은 아무 것도 망설일 것 없다는 듯 단호하고 짧습니다. 분량이 많지 않은 소설이기도 하지만 짧은 문장에 여백으로 나누어진 단락들이 다음 문장들을, 다음 단락들을 기대하게 하고 조금이라도 빨리 건너가게 합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건너고 건너다 보면 소설의 말미에 가서 '이게 뭐야, 어떻게 된 거야'하고 경악하게 만드는 반전을 만나게 됩니다. 소설 중간에 '혼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혼돈이 당신을 쳐다본다'라는 니체의 말이 인용되어 있는데 독자들이 딱 그런 상황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피비린내가 낭자한 소설을 기대하신 분들이라면 전혀 다른 내용 전개에 실망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단언컨대(무엇도 단언할 수 없는 시대에 살면서 이런 말이 좀 위험하긴 합니다만) 다른 어떠한 살인자의 이야기보다도 서늘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Posted by 울산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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