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63주년] 우리 역사, 우리가 바로 알자
누리 GO/누리생활정보2013. 6. 25. 17:24

 

 

 오늘은 6 25, 6.25전쟁 발발 63주년이 되는 날 입니다. 6.25전쟁은 광복 후 그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큰 아픔을 주었습니다. 전쟁 발발 이후 3년 뒤에야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는데요, 6.25전쟁이 발발 된지 63주년, 정전협정이 체결 된지 60년이 되었답니다.

 

얼마 전, 조사에서 성인의 36%, 청소년의 53% 6.25전쟁이 언제 시작된 지 모른다는 조사가 나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우리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남긴 역사지만 또 한 번 번복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남침? 북침?

 

최근 한 조사에 따르면, 고교생 응답자의 69% 6.25를 북침이라고 응답한 충격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발발 원인을 물었을 때, 응답자 전원이 ‘6·25전쟁은 북한이 남한을 침공해서 일어난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기성세대에게는 익숙하지만 젊은 세대들이 한자(漢字) 표현에 익숙하지 않아 의미가 정확히 전달되지 않는 것이 원인이 되었답니다.

 

북침 남침 표현에 대해 많은 이가 헷갈려 하는 현상은 지난 10여 년간 우리 사회가 겪어온 이념적 혼란의 결과 역시 원인이 되었습니다. 중고교에서 좌파적 시각을 가진 일부 교사의 영향으로 6·25전쟁을 어느 일방의 침공에 의한 전쟁이 아닌, ‘남북한 간의 국지전적 무력 충돌이 확전된 내전또는미국이 북한의 공격을 유도한 전쟁등으로 배운 학생이 생겨났고, 좌파적 역사관이 교단에서 횡행하던 시기에 북침 남침 등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표현 자체가 지닌 의미도 퇴색하는 현상이 벌어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입니다.

 

그렇다면 , 남침과 북침 중 어떤 말이 맞을까요?

 

 

 

북침(北侵): (남쪽이) ‘북쪽을 침략한다는 의미.

 

남침(南侵): (북쪽이) ‘남쪽을 침략한다는 의미. 6·25전쟁의 경우가 들어맞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북한이 침략했다.’ 라는 표현을 사용해 왔습니다. 앞으로는 그 의미를 확실하게 알고 6.25 전쟁은 남침이라고 표현해야 맞는 표현이랍니다. 또한 앞으로 청소년들의 올바른 이해를 돕기 위해 역사 교과서에는 북침과 남침이라는 표현의 뜻까지 기술하여, 우리나라의 역사를 이해하기 쉽게, 정확하게 전달할 필요가 있습니다.

 

 

 

 

 

6.25전쟁의 발발 원인

 

6.25전쟁은 남한과 북한이 사회이념을 가지고 싸운 전쟁입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한국은 일본의 불법적인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카이로회담에서 나라의 독립이 약속은 되어 있었으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 미소 양군이 분할 진주함으로써 국토의 분단이라는 비참한 운명에 놓이게 됩니다. 북한은 소련의 사회공산주의를 선택하였고 남한은 미국의 민주자본주의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6.25는 우리의 전쟁이지만 사실상 미소냉전에 의한 세계의 새로운 구도에 끼어들어 미소의 대리전쟁을 하게 된거나 마찬가지입니다. 38도선을 경계로 남북간은 왕래와 일체의 통신연락을 단절되었고 북한의 소련당국은 공산화 통일이 되지 않는 이상 어떠한 통일정부수립도 거부하면서 정치적 분단을 강요 했습니다.

 

1947년에 미국과 유엔은 단일정부 수립을 위해서 통일된 한국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하려고 하지만 1948 1월 소련 군정당국이 이를 거부하고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지역 출입을 막음으로써 좌절 되었습니다. 결국 1948 5 10일 남한 정부에서만 자유 총선거가 실시되어 8 15일에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세계에 선포되었습니다.

 

 이어 1948 9 9일에 소련군의 비호 아래 북한지역에는 김일성을 내세워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공산 제국의 승인을 얻어내면서 분단된 정부는 수립됩니다. 2차 대전으로 남북한을 분할 점령한 미국은 공산주의가 퍼지지 않게 하려고 남한을 원조했고, 소련은 공산주의를 확산시키기 위해 북한을 지원한 결과로 북한 김일성의 남침야욕과 합쳐 일어난 전쟁입니다.

 

 

 

 

 

6.25전쟁의 전개 과정

 

6.25전쟁은 1950 6 25일 발발하여 3 1개월간 계속된 한국의 전쟁입니다. 해방 후 5년 만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민족통일을 표방한 전쟁이었으나, 민족의 분열과 대립을 심화시키고 분단체제를 강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950 6 25일 오전 4시경 38선 여러 지역에서 북한의 공세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6.25전쟁은 크게 4단계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 제 1단계 북한의 승세 기간

 

북한 인민군이 4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3개월 만에 대구·부산 등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전 지역을 장악한 시기입니다. 인민군은 점령지역에서 당과 인민위원회를 재건, 토지개혁을 비롯한 일련의 개혁조치를 단행했습니다. 그러자 미국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개최, 국제연합군 참가를 결의케 했고, 이로써 전쟁은 국제전이 되었습니다. 당시 안전보장이사회에는 소련이 중국문제로 불참중 이었으므로, 거부권 행사 없이 미국 안이 통과되었습니다. 당시 미 지상군은 이미 한국전선에 투입되어 있었습니다.

 

 

- 2단계 인천상륙작전

 

미군을 주로 한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 서울을 탈환하고, 38도선을 넘어 평양을 점령했으며, 한국군 일부가 압록강 근처 초산까지 진격한 시기입니다. 전쟁의 고비는 38도선 이북으로의 진격문제에 있었습니다. 이승만은 북진을 주장했고, 미국 역시 북진이 유리하다고 판단, 38도선을 넘었습니다. 미국의 영향 하에 있던 유엔은 총회에서 38도선 이북 진격을 승인하고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을 설치했습니다.

 

 

- 3단계 중공군의 개입시기

 

유엔군의 북진에 위협을 느낀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 한국군이 오산 부근까지 후퇴했다가 다시 38도선을 넘어 철원·금화 일대까지 진출하고, 소련이 휴전을 제의, 휴전교섭에 들어간 시기입니다. 중공군 개입으로 전쟁이 새 국면에 접어들자,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만주를 폭격하고 중화민국의 장개석 군을 동원, 중국 남부지방에 제2전선을 설정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맥아더의 전쟁 확대론은 세계대전으로의 확대를 우려한 미국정부에 의해 저지되었고, 맥아더는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습니다.

 

- 4단계 휴전 협정의 성립시기

 

소련 유엔대표의 휴전제의를 미국이 즉각 받아들여 15일 만에 개성에서 예비회담이 개최되고, 이어 본회의가 열렸습니다. 주요문제는 비무장지대 설치를 위한 군사경계선 설정, 휴전 감시기관 구성, 포로교환 등이었습니다. 휴전회담은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진행되었습니다. 미국은 한미상호안전보장조약 체결·경제원조·한국군 증강 등을 조건으로 이승만을 무마시키고, 53 7 27일 유엔군과 북한 인민군 사이에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마침내 전쟁은 끝나고 휴전상태에 들어갔습니다. 한국전쟁은 남북 쌍방에 약 150만 명의 사망자와 360만 명의 부상자를 냈고, 국토의 피폐화를 가져왔습니다.

 

 

 

 

6.25가 일어 난 후

 

3 1개월간 지속된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450만 명에 달합니다. 그 가운데 남한의 인명피해는 민간인 약100만 명을 포함한 약 200만 명이며, 공산진영의 인명피해는 100만 명의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2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전쟁기간 중 한국은 43%의 산업시설과 33%의 주택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전쟁 이후 현재까지 반세기가 넘도록 휴전선은 고착화 되었고 남북간은 대립과 완화를 반복하는 긴장관계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직까지도 6.25 전쟁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고 피폐해진 사람들은 몸과 마음의 병이 치유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있습니다. 또한 천만 이 산가족은 현재까지도 전쟁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실, 남북한은 아직도 전쟁 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휴전협정 후에도 크고 작은 도발과 무력적인 충돌이 있었고, 전쟁은 사이버 전쟁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60년동안 전쟁 준비를 지속적으로 해오면서 점점 평화 통일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젠 혈육의 정이 남아있는 이산가족 세대들도 자연의 이치에 의해 이제 사망하여 줄어들고 있기에 민족의 끈끈함이 더 사라지기 전에 민족의 분단을 해결하는 것이 우리세대의 숙제일 것입니다. 6.25전쟁의 비극적인 아픈 역사를 후세대에도 이어나가 6.25 참전 용사들의 용맹함을 기리고 통일의 중요성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