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주군 범서읍 입암리에는 선바위(入岩)라는 이름을 가진 절묘한 바위가 있다. 마치 금강산 해금강의 한 봉우리를 옮겨 놓은 듯 숱한 전설을 간직한 바위 하나가 태화강 상류에 우뚝 솟아 있다. 높이 33.2m, 둘레 46.3m의 이 선바위를 보듬고 있는 자리가 백룡담 여울이다. 옛 사람들에 의하면 백룡이 살았던 곳으로 날이 가물어 천지가 타오를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리면 영검이 있었다고 한다. 산 좋고 물 맑은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연을 벗 삼아 풍류를 즐겼는데, 훗날 정각을 세워 ‘입암정’이라 했다. 이곳을 주로 이용한 선인은 정몽주, 이언적, 정구 선생이다. 100리를 흘러온 쪽빛 태화강의 아름다움과 절개 높은 선비의 꼿꼿함을 상징하듯 대자연의 손길이 정성스럽게 빚은 선바위 뒤에는 선암사라는 자그마한 절이 있어 운치를 더한다. 사찰 마당에 핀 연꽃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고취시킨다. 태화강 선바위 인근에서는 2002년부터 연어 방류 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방류된 치어들이 되돌아오는 늦가을이 되면, 선바위 일대는 산란을 위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들의 힘찬 모습이 장관을 이룰 것이다. 울산 태화교와 삼호교 사이, 태화강을 따라 형성된 십리대밭은 폭 30m, 길이 4km에 이를 정도로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다. 일제시대 잦은 홍수 범람으로 농경지 피해가 많아지자 주민들이 홍수 방지용으로 대나무를 심었던 것이 오늘의 십리대밭으로 이어졌다. 태화강 십리대밭은 굽이치는 강물과 장엄한 대밭, 넓은 둔치 등이 어우러지면서 시민들의 포근한 휴식처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철새들의 도래지로써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한다.


설화/전설

● 선바위와 백룡담

옛날 범서읍 입암이란 마을에 예쁜 처녀가 살았는데, 이 마을 총각들은 그 처녀의 미모에 반하여 저마다 짝사랑을 하였고, 그 짝사랑을 이루어 보려고 처녀의 집주위를 맴돌았지만 처녀는 일체의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는데, 하루는 스님이 동냥을 하러 이 마을에 내려 왔다가 마을총각들이 나누는 처녀의 미모에 대한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다.
스님은 번뇌를 이기는 백팔염주를 목에 걸고 손엔 염주를 수없이 세며 다짐을 하고 부처님의 제자인 처지를 가다듬었지만 왠일인지 머릿속엔 자꾸만 미모의 처녀상이 스님의 다짐을 흩트리고 있었다.
결국 스님은 바랑을 진채 처녀의 집앞에 서서 염불을 외었다.
처녀가 공양미 한 됫박을 들고 대문을 나왔을 때 스님은 그만 속인으로 변해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가 발로하여 공양미를 자루에 부으려는 순간 스님은 처녀의 두손을 덮썩 잡고 말았다. 처녀는 놀라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말았지만 스님은 처녀의 환상을 지울 수가 없어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 다음날 아침 처녀가 빨래를 가지고 강가로 나가는 것을 본 스님은 뒤를 따라가 빨래를 하고 있는 처녀의 자태를 바라보면서 덮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고 있을즈음 태화강 상류에서 번쩍선 큰 바위하나가 유유히 떠내려오는 것을 본 처녀가 “어머나 이상도 해다, 바위도 장가를 가나”하고 혼자말로 내뱉었다.
처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위는 “우두둑”하는 폭음과 함께 빨래하는 처녀를 깔고 앉으려하자 이 광경을 보던 스님이 숲을 뛰쳐나와 처녀를 구하려는 순간, 스님도 함께 바위밑에 깔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미모의 처녀와 스님은 나란히 바위밑에 깔려 버렸으며, 바위는 여기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그 자리에 정착한 바위가 바로 선바위이다. 선바위가 있는 백룡담에는 처녀의 영혼이 살고 있고, 그 아래 백천에는 스님의 영혼이 살았다고 하여, 날씨가 흐리거나 비라도 올라치면 스님의 영혼이 현형(現形)된 큰 구렁이가 오색찬란한 서광을 발산하면서 물살을 가르고 치솟아 백룡담에 처녀의 혼과 상봉하러 올라갔다. 이런날 밤에는 백룡담에서 여인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리면서 스님의 영혼을 기다렸고, 이렇게 해서 상봉이 이루어지면 백룡담에는 온통 물굽이가 치솟으며 소용돌이가 일어나면서 찬란한 서광이 가득했다고 한다.
이것은 파계승과 처녀가 하늘의 노여움을 사서 저승에서도 맺어지자 못하고 비라도 내리려는 밤에만 간혹 상봉하게 했다고 한다.

● 황룡연
신라 선덕여왕 시절 자장법사가 중국 당나라의 태화지(太和池)라는 연못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어째서 여기에 왔느냐고 물었다. 이에 법사는 보리(菩提· 깨달음)를 구하기 위함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너의 나라는 어떠한 곤란을 당하고 있느냐?”고 신인이 되묻자 법사는 “북으로는 말갈족, 남으로는 왜인이 있으며, 고구려와 백제의 두 강대국이 국경을 차례로 침입하는 등 이웃의 침략이 잦아 커다란 근심이자 환란이 된다.”고 전하였다.
이 말을 듣고 난 신인이 이르기를 “지금 신라의 여자 임금은 덕은 있으나 위엄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웃나라가 도모하려는 것이니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또한 “황룡사(皇龍寺)의 호법룡(護法龍)은 곧 나의 장자(長子)로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신라로 돌아가 황룡사에 9층 탑을 이룩하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9한(九韓)이 와서 조공할 것이다. 더불어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죄인들을 용서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하게 되며, 남쪽에 절을 짓고 나의 복을 빌어준다면 나 또한 보답하리라!”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 자장법사는 선덕여왕 12년(643)에 신라로 돌아와 황룡사에 9층 탑을 세웠으며, 통도사와 태화사를 창건하였다. 즉, 울산의 태화사는 중국의 태화지용(太和池龍)이 청한 대로 용의 복을 축원하기 위해 지은 사찰이다. 또 태화사 앞의 강을 태화강이라 하였는데, 태화지용의 식복(植福)과 연관지어 용연(龍淵)이라 불렀다.
용연은 훗날 황룡연(黃龍淵)으로 바뀌었는데, 황룡사(皇龍寺)와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황룡연은 태화사와 마찬가지로 신라의 호국 불교에서 유래된 설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황룡연은 언제부터인가 ‘용금소’로 불려졌는데, 태화교 서북편 벼랑 밑의 강 한가운데 솟은 바위를 용머리바위라고도 하였다. 강심이 깊다하여 명주실 한 타래를 풀어도 바닥에 닿지 않고, ‘백양사(白楊寺)’의 우물과 연결된 굴이 있다는 등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 이수삼산
“삼산은 반락에 모란봉 되고, 이수의 중분이 능라도로다”라는 노랫말이 있다. 이것은 평양의 대동강에 있는 모란봉과 능라도의 절경을 노래한 것이지만 울산에도 그에 못지않은 절경이 있었다. 바로 이수삼산이다. 이수란 태화강과 여천강을 말하고, 삼산은 삼산동에 나란히 삼봉이 솟아있던 삼산을 말한다. 울산은 지형의 변천이 아주 컸다.
조선 중엽 이전에 삼산과 관상의 들은 모두 바다였다. 경주 입암지에 있는 임해전(臨海殿)은 바다에 임해 있는 전당이라는 뜻으로 옛날에는 바다가 입암지 앞까지 접해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던 것이 기나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산에서 내려오는 토사가 점점 퇴적되어 육지로 변모했다. 삼산들, 관상들이 바다였을 때는 학성공원도 바다 가운데 고개를 쑥 내민 작은 반도였고, 내황동은 내황이 아니라 내항(內港)이었다.
그 무렵 삼산은 삼봉이 나란히 바다 가운데 솟아있는 섬이었으니 상상만 해도 빼어난 풍광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바위가 깎이고 돌이 부서지는 퇴적이 진행되면서 바다가 메워져 태화강 북쪽은 관상들로, 남쪽은 삼산들이 되었다. 퇴적이 멈춘 삼산들 남쪽 낮은 산기슭에는 화진도가 남아 아름다운 이수삼산을 형성한 것이다.

● 태화사지와 자장율사
자장법사가 창건한 울산 태화사는 양산 통도사에 버금가는 대 가람으로 신라 10대 사찰의 하나였다고 한다. 지금도 중구 태화동 일대의 밭이나 집터에서는 신라 시대의 토기와 기와 조각들이 출토되고 있으며, 부도가 세워졌던 골짜기를 부도골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처럼 유서 깊은 태화사는 전쟁으로 소실되고,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고려 성종 임금이 울산에 당도하여 태화사지의 누각에 올라보니 저절로 감탄이 이어졌다고 한다. 누각 아래로 맑게 흐르는 태화강에는 고기떼들이 뛰놀고, 강 건너 장춘오의 우거진 해죽림(海竹林)과 산차(山茶), 동해의 푸른 물결 위로 한가로이 비행하는 갈매기 등이 어우러져 천하 제1경이라고 칭송했다.
왕이 신하들과 함께 풍류를 즐기는 사이에 태화강에서 큰 물고기 한 마리가 솟아올라 백사장에 떨어져 꿈틀거렸다. 이를 동해용왕의 선물로 여긴 성종 일행은 함께 물고기를 나눠먹었다. 그런데 그날부터 성종은 병마에 시달리기 시작하더니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성종이 승하하자 사람들은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동해용왕의 특사였는데 속세 인간들의 어리석음 때문에 결국 왕이 승하한 것이다.”라고 수군거렸다. 울산에 부임한 역대 수령들은 이 누각을 영빈관으로 단장해 그 아름다움을 이어갔다. 그 후 누각은 태화루(太和樓)라고 명명되었는데, 전국의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찾아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조선 초기에 동국여지승람을 편술한 서거정은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도 좋지만 그보다 더 훌륭한 누각은 영남의 제1경 울산의 태화루”라고 극찬하며 친필로 태화루 현판을 써서 걸었다.
임진왜란 당시 태화루가 화염에 휩싸여 있을 때, 어느 촌로가 다행히 현판을 거두어 가보로 대물림하며 보존하게 되었다.

● 어사암과 원고개
조선 말기 다운동 다전(茶田) 마을에는 망조당(望潮堂) 서인충의 5세손 서달급이 다산사(茶山祠)를 세워 망조당을 받들고 있었다.
어느 날 울산도호부사가 이 다산사에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수하로부터 급한 기별을 받았다. 구름(雲谷) 마을을 지나가는 한 나그네가 있었는데, 그 풍채나 거동이 아무리 보아도 보통 선비와 달라 매우 수상하더라는 것이다.
이 말을 전해들은 도호부사의 머리 속으로 어떤 육감이 스쳐갔다. 급히 걸음을 재촉하여 난곡(蘭谷) 마을로 나 있는 지름길을 빠져나와 다시 발길을 돌려 구름 마을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곧 이어 도호부사는 큰 바위 위에 앉아 쉬고 있는 나그네와 맞닥뜨렸다. 이에 도호부사는 그 나그네 앞으로 나아가 정중히 인사하며 성내로 안내하였다. 훗날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 나그네는 다름 아닌 암행어사였다고 한다. 그 일이 있은 후로부터 사람들은 나그네가 쉬고 있던 바위를 가리켜 어사암(御史巖)이라 하였고, 도호부사가 지나갔던 지름길을 원님이 질러간 고개라는 뜻에서 원고개라 불렀다.
이 어사암은 원래 높이 4m, 직경 3m에 이르는 바위로 사람 10명 정도가 앉을 수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메워져 그리 높지 않다.

● 베리끝의 애화
울산에서 언양까지 지방도가 나기 전에는 구름이 마을이나 다전에서 구영리로 지나다닐 때 낙안산 끝에서 벼랑을 따라 베리끝을 오가곤 하였다. 이 길은 깊은 계곡과 높은 벼랑이 계속 이어 지는 등 산세가 매우 험준한 지형이다.
어느 해 여름, 며칠을 두고 큰 비가 쏟아져서 태화강은 홍수로 뒤덮였다. 온 마을을 집어 삼킬 듯 세차게 퍼붓던 비가 멎은 뒤에도 강물은 여전히 위험 수위를 넘나들고 있었다.
강물은 길가로 넘쳐 낭창낭창하고, 홍수는 사납게 굽이치며 흘렀다. 행인들은 급류 앞에서 정신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 무렵 젊은 신랑 신부 한 쌍이 미혼인 누이동생과 함께 베리끝을 지나고 있었다. 신랑의 뒤를 따라오던 신부와 누이가 그만 발을 잘못 디뎌 강물에 빠지고 말았다.
비명 소리에 놀란 신랑이 뒤를 돌아보았으나 이미 처와 누이는 성난 탁류에 휩쓸려 몸을 가누지 못했다. 신랑이 얼떨결에 자신의 앞을 떠내려가는 옷자락을 잡아 간신히 건져 보니 아내였다. 잠시 안도의 숨을 내쉬는 사이 누이는 강 한가운데로 얼굴을 한번 솟구치더니 저승의 문턱을 넘고 말았다.
이 애처로운 일이 있은 뒤로 누가 지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슬픈 노래가 전해진다.
낭창 낭창 베리끝에 무정하다 우로라바
나도 죽어 후생가면 낭군님부터 정할래라

● 나가소
어느 옛날의 일이었다. 다운동 다전(茶田)의 낙안산 끝에는 나씨(氏) 일족이 큰 마을을 형성하며 살고 있었다. 그 무렵 태화강은 지금과는 달리 범서읍 백천에서 굴화 앞을 지나 삼호 마을의 남쪽으로 흘렀다고 한다. 나씨들의 마을은 땅이 넓고 기름진 곳이어서 대대로 풍족한 삶을 선사하였다. 게다가 나씨 마을은 신라의 서울인 경주에서 동래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여 과객들의 출입이 빈번하였다. 하루는 해가 서산에 기울었을 때, 남루한 옷차림에 지팡이를 짚고 있어 마치 걸인처럼 보이는 노인이 마을의 가장 큰 부잣집을 찾았다. 대문 앞에서 목청을 둗우어 주인을 부르자 노비가 고개를 내밀었다. 하룻밤 신세질 수 없겠냐는 청탁을 건네고 한 참을 기다린 끝에 집 주인이 나왔다. “월성에서 동래로 가는 길손이온데 그만 해가 저물기에…”하며 노인이 말끝을 흐렸고, “그래서 어쩌자는 거요?”라며 되묻는 주인의 말은 아주 언짢은 눈치였다. 노인이 헛간이라도 괜찮다는 뜻을 전하자 “마을을 찾는 손님들 때문에 진절머리가 나서 못살겠소. 손님 없는데 사는 것이 소원”이라며 주인은 냉정하게 돌아섰다.
노인은 어쩔 수 없이 길을 재촉해 무거동의 한 주막집에서 밤을 쉬었다. 아침이 되어 노인은 영취산(靈鷲山)으로 올라가더니 한동안 문전박대를 당했던 나씨들의 마을을 응시했다. 기와집이 옹기종기 들어선 부자 마을을 바라보며 말이 없던 노인이 주문을 외우더니 지팡이로 구영동 앞에서 베리끝을 거쳐 마을 쪽으로 크게 선을 그었다.
노인이 자취를 감춘 뒤 서쪽 하늘에서 검은 구름이 몰려와 하루 종일 큰 비가 내렸다. 다음 날 새벽이 되어 비가 멎었지만, 이 일대에는 많은 천재지변이 일어났다. 곳곳에 산이 무너지고 강의 물줄기도 크게 달라졌다. 태화강은 베리끝에서 나씨들의 마을을 지나 지금과 같은 형태로 변하였고, 나씨들의 마을이 사라진 자리에는 큰 못이 생겨났다. 그 마을 터를 ‘나가소’라 하는데, 그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온다.

● 장춘오와 산차
울산시 신정동 태화교 남서쪽의 태화강 일대를 장춘오라고 한다. 감출 장(藏), 봄 춘(春), 마을 오(塢)자로 ‘봄을 감춘 마을’이라는 뜻이다. 추운 겨울에도 이곳에는 풀과 꽃이 돋아 있을 정도로 아늑하고 밝아 마치 봄철인양 착각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렇듯 장춘오는 제철에 온 봄을 감춰 뒀다가 겨울에 자랑시키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 고승 자장법사가 제자 10여 명고 함께 당나라에서 8년 동안 수도하면서 오대(五臺)를 거쳐 태화지(太和池)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문수보살이 나타나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백 개와 홍가사(紅袈裟)를 주면서 신라로 돌아가거든 불교를 크게 일으켜 달라고 당부하였다. 이에 법사가 문수보살에게 정중히 예를 올린 뒤 사리, 가사를 받아 출발을 서둘렀다. 때마침 법사 앞에 태화지의 용이 모습을 드러내고는 신라에 살고 있는 자신의 작은 아들을 위해 식복을 빌어 달라고 하였다. 신라에 돌아온 법사는 태화지의 용과 약속한 대로 양산 통도사와 울산 태화사를 짓고, 황룡사탑을 쌓았다. 그리고 문수보살이 준 석가모니 사리 백 개를 황룡사의 탑, 통도사의 금강계단(戒壇), 울산 태화사의 부도에 각각 삼등분하여 봉안했다.
태화사 앞을 흘러가는 태화강에는 황룡연이라는 깊은 소가 있는데, 이 황룡연 남쪽 부근 일대를 장춘오라 일컫는다. 여기에 때때로 용이 올라 와서 몸을 말리고 쉬었다가 다시 황룡연으로 들어갔다고 하니, 사계절이 푸르고 따뜻하며 갖가지 꽃들이 만발한 장춘오는 용궁의 정원인지도 모른다. 용이 한번씩 장춘오로 올라오는 밤이면 황룡연의 물결이 사방으로 요동쳤으며, 오색찬란한 서광이 천지를 황홀하게 하고 황룡의 몸이 눈부시게 빛났다고 한다.
용의 휴식처 장춘오 주변에는 해죽(海竹)이 무성했는데, 그 안쪽으로 산차(山茶) 나무가 자랐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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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울산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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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란비뿡 2011.05.23 17: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울산 살았을 때 태화강 근처에서 살았거든요^^..옛날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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