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괘천(酌掛川)은 수석이 청정하고 화강암이 세월의 물살에 깎여 마치 술잔을 주렁주렁 걸어 놓은 듯이 기이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작괘천은 해발 1,083m의 간월산(肝月山)에서 발원하여 109척의 홍류폭포를 거치면서 옥수를 이루어 작천정앞 화강석을 다듬고 태화강으로 흘러간다. 물이 흐르지않는 바닥은 백포반석(白鋪盤石)을 이루며 자연석 평상을 형성하여 이곳을 즐기는데 알맞은 자리를 제공한다. 작괘천의 절경은 이른봄 진입로에 아름드리 우거진 1km의 벚꽃터널에서 시작되며 여름철 옥수와 화강석이 빚어내는 맑고 청아한 계곡에 발을 담그면 시 한수 절로 읊조려 진다. 1902년 군수 최시명에 의해 건립된 작천정 주변은 가을철 만상홍엽으로 상춘객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하고,한겨울 홍류폭포의 얼어붙은 물줄기의 기이한 형태는 보는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낸다. 작괘천은 역사적으로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의병이 쓰러져간 격전지이자 언양지역3.1운동의 중심지였다. 선무원종공신암이라 불리는 큰바위에는 서천혈맹(誓天血盟)하여 나라를 지킨 열의사의 이름이 세겨져 있어 뼈아픈 역사의 흔적을 느낄수 있다. 작괘천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리에 물과 바람,돌과 숲이 어우러져 한폭의 동양화를 연출하고 오늘도 그하얀 속살을 드러내어 일상에 지친 현대인에게 편안함과 여유를 제공한다.

설화/전설

● 축선사
축선사는 신라 김유신이 세웠던 절로서 삼남면 하잠리에 있었다. 신라 혜공왕 14년(778) 김유신의 무덤에 홀연히 바람이 불면서 한 사람이 준마를 탔는데, 장군의 모습과 같았다. 의갑(衣甲)과 기장(器仗)을 차린 장군 40여명도 그 뒤를 따라 죽현릉(竹現陵· 미추왕릉)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땅이 진동하며 마치 호소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평생 나라를 위해 환난을 물리치고 통일의 대업을 이루었으며,지금은 혼백이 되어서도 그 마음에 변함이 없는데, 지난 경술년(혜공왕 6년)에 내 자손이 죄 없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는 군신이 모두 나의 공을 생각지 않는것이다. 차라리 다른 곳으로 옮겨 다시는 나라를 굽어 살피지 않겠으니 임금님께서는 허락하소서!" 하는 것이다. 이에 임금은 “그대가 이 나라를 수호하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떻게 할것인가? 공은 예전과 같이 노력하라!”며 세 번이나 청했지만, 다 듣지 않자 혼백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돌아갔다. 혜공왕이 듣고 놀라 신하 김경신을 김유신 능에 보내 사과하고 공을 위하여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結)을 축선사에 내려 명복을 빌게 하였다. 이 절은 김유신이 평양토정(平壤討定) 뒤에 식복(植福)키 위하여 세운 것이다.

● 화장산 도화
울산에는 두 곳의 화장산이 있는데, 이 이야기는 언양읍과 상북면에 걸쳐 있는 화장산(花藏山)의 일화이다. 신라시대 화장산 아래에서는 어느 사냥꾼 내외가 두 남매를 기르며 살고 있었다. 화장산 위의 굴속에는 커다란 곰 한 마리가 있었는데, 가까운 산의 짐승까지도 잡아먹었다.
곰을 찾아 나선 사냥꾼 내외는 불행하게도 역습을 당하여 죽고 말았다. 집을 지키던 오누이는 밤이 되어도 부모님이 돌아오지 않자 이튿날 새벽부터 화장산으로 향했다. 남매는 여기저기 헤매다가 엄동설한의 눈 속에서 서로 부둥켜안은 채 동사했다. 이를 지켜 보던 사냥꾼 내외의 혼백은 남매의 영혼을 도화(桃花)로 환생시켜 양지쪽에 피게 하였다. 그 무렵의 일이었다. 임금님이 병환에 들어 좋다는 약을 다 써 보았으나 백약이 무효하여 궁궐 안은 큰 수심에 잠겨 있었다. 어느 의원이 병상에 나아가 아뢰기를 “어려운 일이지만, 복숭아꽃을 잡수신다면 병이 나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은 사자(使者)를 풀어 도화를 찾게 하였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남쪽 헌양성으로 오게 되었다. 성의 남문에 사자가 이르렀을 때였다. 문득 머리를 서쪽으로 돌리는 순간 화장산에서 이상한 기운이 감돌며 꽃이 보이는 것이었다. 겨울임을 감안하면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급히 올라가보니 큰 바위굴 앞 양지 바른 곳에 두 그루의 복숭아 나무에 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이것을 먹은 뒤 임금의 병은 완쾌되었다고 한다. 사자가 복숭아꽃을 꺾을 때 몇 송이의 꽃이 떨어졌는데, 오빠의 혼은 대나무가 되고, 누이의 혼은 소나무가 되어 만고에 푸르고 있다.

● 고헌산(고함산)
언양에 있는 고헌산을 속칭 고함산이라고 한다. 이는 산의 서쪽에 있는 경주시 산내면의 주민들이 즐겨 불러오던 이름이다. 이 산에는 디린바우라는 유명한 바위가 있다. 높고 큰 층암으로 이뤄진 이 바위는 위에서 아래로 드리워져 있다 하여 디린바우라 한다. 이 디린바우는 무척 험하여 좀처럼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다. 때문에 이 곳에는 석이(石耳)라 하는 버섯이 돌 틈에 무성하게 자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디린바우에는 예로부터 커다란 지네와 거미들이 살았다고 한다.
옛날 한 용감한 사나이가 디린바우의 석이를 몹시 먹고 싶어 했다. 그는 나무둥치에 매어 놓은 줄을 허리에 감고 바위 아래로 내려가 석이를 따기 시작하였다. 온 정신이 버섯에 팔려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근처에서 나무를 하던 어떤 사람이 잠시 쉬면서 고개를 들어보니 디린바우에 한 사람이 매달려 석이를 따는데, 그 위로 큰 거미가 줄을 물어뜯고 있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목이 터지도록 소리쳤다. “보소, 보소. 버섯 따는 사람 보소!”하며 몸짓을 섞어 가며 계속 고함을 지르자 버섯을 따던 사나이가 겨우 손으로 응대를 하는 것이었다.
뒤이어 무슨 말인지를 경청한 사나이가 위를 보니 디린바우의 지킴(찌굼)인 거미가 보였다. 놀란 사나이는 급히 몸을 피하여 위기를 벗어났다. 그러한 일이 있은 뒤부터 이 곳 사람들은 고헌산을 고함산이라 하였다.

● 천전석불
상북면 천전리에는 1843년에 세웠다는 용화사(龍華寺)가 있다. 이 절에는 유명한 석불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조선시대 현역군을 말하는 번상군(番上軍)에 대한 경비 염출로 양인(良人)은 군역을 지는 대신 보(保)라는 군포(軍布)를 받치게 되어 있었다. 이 제도는 훗날 국방상의 필요보다 군포를 거두어 국가 재정을 확보하는데 주된 목적을 두게 되었다. 병역을 면제받는 대역세(代役稅)로서 포2필을 바치던 양역들이 관리와 결탁하여 그 마저도 바치지 않는 경우가 빈번했다. 결국 힘없는 가난한 사람들만이 모든 부담을 지게 되었다. 심지어 어린 아이를 어른과 같이 취급하여 세금을 부과하는 황구첨청(黃口簽丁), 죽은 사람에게 세금을 매기는 백골징포(白骨徵布)까지 유행하는 등 사회가 날로 타락해 갔다. 이런 시기에 언양 현감이 세금을 거둬들이고 있었다. 천전(川前)에서는 장정수가 모자라 어쩔 수 없이 마을에 있는 미륵(彌勒)으로 장정수를 충당하였다. 그 뒤에 관아에서는 장정의 수 만큼 사정없이 군포를 수납하였다. 관아의 횡포가 계속되면서 민심은 동요했다. 마을 사람들이 원통하여 크게 부르짖으며 “석불을 장정으로 충당하더니, 세금이 우리 영세민에게만 미치는구나!” 하였다. 사람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석불의 어깨에 두 필의 면포가 얹혀졌다.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은 그 석불의 영검에 감탄하여 그 자리에 용화사(龍華寺)를 지어 석불을 덮어 모시게 되었다.

● 열녀 정씨와 호묘
조선 태종 때 신녕 현감(新寧縣監)을 지냈던 유혜지(柳惠至)에게 정씨 부인이 있었다. 정씨 부인의 나이 스물여섯 살에 남편이 세상을 뜨고 말았다. 같이 죽고 싶었으나 어린 아들이 있어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부인은 3년의 시묘(侍墓)살이를 위해 산으로 들어가 묘소 근처에 움막을 얽었다. 짐승들의 울음소리와 움막을 기웃거리는 건달들 때문에 무서움이 컸었는데, 어느 날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놀란 정씨부인이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사람을 해칠 것 같지 않아 마음을 놓았다. 그 뒤로 호랑이는 밤마다 움막을 지켰으며 정씨 부인은 하늘이 내려주신 가호로 여겼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하루는 호랑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궁금해 하며 얼핏 잠이 든 정씨 부인의 꿈에 호랑이가 나타나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부인이 꿈에 본 자리로 달려가 보니 마을 사람들이 함정에 빠진 호랑이를 에워싸고 있었다. 부인은 자신과 같이 시묘하는 착한 호랑이라며 살려줄 것을 애원하였다. 그 호랑이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부인의 청에 따라 놓아 주었다. 그렇게 3년 상을 치룬 정씨부인이 다시 묘소를 찾았다. 만감이 교차했다. ‘이제 당신의 뒤를 따르리라!’고 다짐하였다. 그 때 갑자기 묘가 갈라졌다. 부인은 말없이 남편 옆에 누웠고, 묘가 닫히면서 부부는 합장되었다.
사흘 뒤, 그 무덤 앞에 호랑이가 죽어 있었다. 이것을 본 가족들이 호랑이도 자리를 골라 묻어 주었다. 정씨 부부의 묘는 화장산 세이지(洗耳池) 밑에 있는데, 향산리 능산(陵山) 마을에 있는 묘가 바로 그것이다. 호랑이의 무덤도 능산의 도로변에 있어 행인들의 눈길을 끈다.

● 청룡등과 용마
삼남면 둔기리 작동(鵲洞)에는 청룡등(靑龍嶝)과 애밀등, 작천(鵲泉 까치샘)이 있다. 둔기(屯基)는 모일 ‘둔’자와 터 ‘기’자로 ‘모이는 터’라는 뜻이다. 일명 ‘둔터’라고도 하는데, 옛날 군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작동(鵲洞)이라는 뜻은 까치 ‘작’자와 마을 ‘동’자로 ‘까치의 마을’이 된다. 작동이라고 마을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원효대사와 연관되어 있다. 대사는 이곳을 지나치면서 ‘이 우물에서 정말로 까치가 나와 울거든 내가 죽은 줄을 알아라.’고 예언했다. 몇 년이 흐른 뒤, 이 우물에서 정말로 까치가 나와 울었다. 원효대사가 입적한 것이었다. 이런 일이 있고부터 이 우물을 가리켜 작천(鵲泉)이라고도 하고, 까치샘이라고도 한다.
작동에 있는 청룡등과 애밀등 두 능선에도 전설이 서려 있다. 청룡등 기슭의 한 농부 가족이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아이를 낳게 되었다. 옛날에는 비범한 아기가 태어나면 장수로 자라 나라에 큰 변이 생긴다 하여 일가족을 처형했다. 때문에 농부 가족은 아기를 죽이려고 서둘렀다. 그런데, 아기가 하는 말이 “나는 쉽게 죽지 않으니 겨드랑이 밑에다 솔가지 불을 피워서 날개를 태우고, 부엌의 판자로 눌러 덮은 후 그 위에 돌무더기로 가려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아기가 죽은 다음날 뒷산에서 천지가 진동하더니 용마 한 마리가 뛰쳐나왔다. 용마는 능산으로 날아가 ‘애밀레, 애밀레’하고 울면서 죽었다. 애미 때문에 장수가 죽었다고 원망하는 소리였다. 그래서 그 후 사람들은 용마가 나온 자리를 청룡등이라고 불렀고, 용마가 죽은 자리를 애밀레등 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Posted by 울산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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