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근교에서의 야간 산행은 빛과 어둠의 세계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낮시간의 고단한 일상에서 쫓겨 여유를 잃어버린 회색 도시는 해가 지면서 형형색색의 불빛으로 뒤덮이고, 마침내 거대한 밤의 신비를 빚어낸다. 별빛이 쏟아지는 해발 453m의 무룡산 정상에 올라서면 산업 수도 울산의 진면목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한반도의 번영을 상징하는 미래의 횃불, 울산공단 야경은 꾸밈없는 무룡산의 자연미와 어우러져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낸다. 내일의 희망을 위해 불면의 밤을 지새우는 울산공단에서 천 년 신라의 역사를 만나는 재미도 쏠쏠하다. 신화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유일한 비밀열쇠 '처용암'과 '개운포 성지'가 바로 그것으로 석유화학단지와 온산공단 사이에 위치해 있다. 관용과 화해의 상징인 처용은 갈등과 대립을 넘어 조화로운 삶을 모색하는 우리의 전통과 맞닿아있다. 해마다 10월이 되면 울산 최대의 축제인 '처용 문화제'가 개최되는대, 각종 문화 행사 및 체육 대회,예술공연 등 풍성한 볼거리가 가득하다. 처용암 옆에는 수령300년이 넘는 동백나무가 울창한 숲은 이룬 동백섬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 65호로 지정된 이곳의 상록수림은 아름다운 주변 경관과 잘 조화돼 섬의 운치를 한층 돋보이게 한다. 무룡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장생포 앞 바다 멀리 눈길 닿는 끝에 울산 귀신고래 회유해면이 있다. 세계적 희귀동물인 귀신고래를 보호하고자 울산의 동해안 일대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것인데, 고래잡이에 얽힌 장생포 주민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곳이다.

설화/전설

● 무룡산의 선녀와 용

   용이 춤을 추던 산이라는 뜻의 무룡산(舞龍山)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무룡산 꼭대기의 넓은 연못에 일곱 마리의 용이 살았다고 한다. 그 중에는 눈이 먼 용한마리가 있어 동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하루는 이곳 연못에 선녀 일곱이 내려와 목욕을 했다.선녀와 용이 어울려 물장구를 치며 놀았지만, 외톨이가 된 눈먼 용은 서럽게 눈물만 흘린 뿐이었다. 이를 안타까워한 마음씨 착한 한 선녀가 눈먼 용을 위로하며 함께 놀기를 청하였다.
   다시 하늘로 올라가야할 시간, 정이 든 선녀와 용은 모두 하늘나라로 올라갔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용은 먼 길을 떠날 수 없었다. 차마 가엾은 용을 두고 갈 수 없어 착한 선녀가 그 곁에 머물게 되었다. "너희들 먼저 올라 가렴! 옥황상제님이 내 사정을 잘 말해줘!" 이에 다른 선녀들이 까르르 웃으며 "옥황상제님이 용서해 주실 것 같으니? 아예 하늘로 올 생각일랑 접어라!"며 그 어리석음을나무랐다.
   이렇게 해서 여섯 선녀와 여섯 마리의 용이 짝을 지어 올라갔는데, 그날부터 천지가 진동하고, 일주일 동안 장대같은 비가 쏟아졌다. 동무 한 명을 남겨 둔 채 허락도 없이 여섯용을 데려온 것에 대해 옥황상제가 크게 진노했기 때문이었다.
   여섯 선녀와 여섯 용들은 얼마 동안 무룡산 연못으로 귀양살이를 떠나게 되었고, 눈먼 용과 착한 선녀는 옥황상제의 부름을 받고 하늘로 승천 해 백년가약을 맺었다.
무룡산 정상에는 그 후 연못은 없어졌으나 대명지(大名地)가 있다고 전해왔는데, 여기에 묘를 쓰면 울산에 가뭄이 온다고 한다.

● 처용랑
   신라 제 49대 헌강왕(憲康王)이 울산으로 나들이 하였다가, 경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마침 동해의 용이 조화를 부려 대낮에 구름이 끼고, 안개가 짙아 앞을 분간할 수 없게 하였다. 이에 왕이 일관(日官)의 조언에 따라 동해의 용을 달래기 위해 근처에 절을 세워주도록 왕명을 내리니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
   동해의 용은 크게 기뻐하여 아들 일곱을 데리고 임금 앞에 나타나 춤을 추며 덕을 찬미하였다. 그 중 한 아들이 임금을 따라가 왕정을 보필하였는데, 그가 바로 처용이다. 헌강왕은 오래도록 처용을 곁에 두고자 어여쁜 아내를 배필로 삼게 하고, 급간(級干)이란 벼슬을 하사했다. 평온한 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처용의 아내를 탐낸 역신(疫神)이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몰래 동침하고 말았다.
   동경 밝은 달에 밤드러 노니다가/돌아와 자리를 보니 가랑이 네히러라
   둘은 내해였고 둘은 뉘해인고/본대 내해다만은 빼겼으니 어찌하리꼬
   이에 역신은 무릎을 꿇고 사죄하되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과오를 범했였으나, 공이 노하지 않으니 감격했으며, 맹세코 공의 형용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는 들어가지 않겠노라"고 하였다. 이 일이 있은 뒤부터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대문에 붙여 요사한 귀신을 쫓고 경사를 맞아 들였다.

● 떠넘긴 죽도
   죽도(竹島)는 울산항 안에 자리 잡고 있었던 조그만 한 섬이었다. 이름이 말해주듯 예로부터 대나무가 많아 이를 화살로 만들어 관아에 상납하던 곳이다.
   울산항의 서쪽에 위치한 죽도는 장생포항(長生浦港)과 양죽(楊竹) 마을의 어귀에 있는데, 다소 거리가 가까운 양죽에서 섬의 관리를 맡게 되었다. 섬을 관리하는데 있어 가장 큰 문제는 화살공납이었다. 잘 다듬은 대나무를 나루터까지 옮기는 일도 힘들거니와 수량이 적거나 품질이 떨어지면 관아에 불려가 곤욕을 치루기 때문이다. 이렇듯 마을에 큰 부담을 주는 섬이 장승개(長承浦)와의 중간에 있으니 양죽 주민들은 가만히 지켜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죽도를 장승개 쪽으로 떠넘기기 위해 주민들은 고심을 거듭했는데, 어느 날 동수(洞首)의 머리에 묘책이 떠올랐다. '이제야 살았다'며 무릎을 탁 치는 그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오래전부터 장승개 주민들이 별신(別神)굿을 할 때, 제당의 고을막이 신을 영감신이라 하고 죽도의 신을 할멈신이라 하여 서로 짝을 이루는 신으로 신봉하였으니, 죽도는 장승개의 것이라는 설명이 가능했다. 이러한 이유를 들어 양죽 주민들은 죽도를 장승개에 떠넘기고, 화살공납에서 오는 고통을 덜게 되었다.

● 망제산
   매암동(梅岩洞)위 양죽(楊竹)에는 망제산(望帝山)이라는 낮은 산이 있다. 조선 시대에 국상이 있을 때, 마을의 선비들은 이 산에 올라가 왕실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고 곡을 하였다고 한다.
나라가 왜인들의 손에 넘어가고, 혹독한 탄압이 계속되던 1919년 1월에 고종황제(高宗皇帝)가 승하하셨다. 망국의 통한이 뼈에 사무치는 가운데, 국상마저 당하니 우리 민족에게는 몇 곱절의 슬픔이 겹쳐온 것이다.
   그해 3월에 고종의 인산(因山)이 있었디. 마을 사람들은 이 때 망제산에 올라가 향을 피웠다. 가슴 미어지는 통곡이 계속되고, 아무도 일어설 줄 몰랐다. 파란만장한 고종의 생애를 추모하는 마음도 컸지만, 나라 잃은 설움이 한꺼번에 북받쳐 올랐기 때문이다.
   세월은 흘러 왕실도 사라졌고, 망곡의 진혼제도 마을 사람들의 뇌리에서 차츰 잊혀져갔다. 다만 지금은 망제산(望帝山), 그 이름만 남아 있을 따름이다. 여기에 망제산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동안 나라를 위하는 백성들의 고운 마음씨가 길이 전해 질 것이다.

● 동백섬
   온산읍 방도리(溫山邑 方島里) 앞바다에는 조그만 섬이 하나 있다. 이 섬은 봄에 동백이 피기 때문에 동백섬이라 한다. 어느 날, 울릉도의 늦가을에 거센 바람이 불어 닥쳤고, 그곳에 있는 동백나무의 한 가지가 부러져서 바다로 떨어졌다. 동백 가지는 물결을 타고 남쪽으로 떠내려갔다. 그 동백가지는 무슨 인연이 닿은 듯 울산 앞바다까지 흘러와 조그만 섬에 당도했다. 이 동백 가지에는 봄에 피었던 꽃이 몇 개의 열매를 맺었다. 겨울이 되어 열매가 터지고, 씨는 흙에 떨어졌다. 봄이 되어 씨에서 싹이 돋아났다. 어렵게 싹을 키운 몇 포기의 동백은 자라서 차차 섬 전체로 퍼지게 되었다. 그 후로 사람들은 이 섬을 동백섬이라 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그 때 이미 섬에 동백이 빽빽하여 동백섬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사람들은 동백섬의 동백을 일러 그 선조와 고향은 멀고먼 울릉도라 하였다.

Posted by 울산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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