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열려 있는 도시 울산. 주전에서 강동으로 이어지는 해안가는 울산이 가진 천혜의 자원이다. 수면 위로 고개만 살짝 내민 기암괴석들과 전국의 수석 애호가들이 탐을 내는 검푸른 자갈밭! 콩알만한 것부터 호박만한 크기에 이르기까지 몽돌이 깔린 바닷가 풍경은 다른 해변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다. 동북쪽으로 울산의 마지막 자연 마을인 강동의 밤 풍경은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근사한 외양의 레스토랑이 해안선을 따라 아름다운 조명을 발하며, 멀리 바다에서는 오징어잡이 어선의 불빛이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동에서 남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주전 해안은 색다른 즐거움이 가득하다. 산등성이를 따라 흩뿌려져 있는 어촌 마을은 정겹기만 하고,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는 푸른 바다와 함께 화려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카페들은 신비로운 색채를 그려낸다. 맨발 등산로, 대규모 꽃단지, 산책로, 장승단지 등 도심 속 휴식공간으로 애용되는 봉대산 공원과 동해안 야경의 진수로 손꼽히는 주전봉수대가 있기에 이 곳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문화유적이 가득한 주전 바닷가와 강동에서 감포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소문난 드라이브 코스로 젊은 연인들을 비롯해 가족 여행객들의 눈높이를 한층 올려놓을 것이다. 강동 정자항 주변의 회센터와 주전동 회촌에서 맛보는 생선회는 미식가들의 입맛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

설화/전설

● 두모오
   울산은 바다를 끼고 있어 예로부터 미역, 광어(廣魚), 대구(大口), 상어, 홍합(紅蛤), 황어(黃魚), 은어(銀魚), 청어(靑魚), 김(海衣), 전복 등 많은 해산물을 조공했다. 그중 청어와 전복은 생어(生魚)를 진상으로 하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맛이 담백한 생복(生鰒)은 양반들이 즐기던 해산물로 진상을 빙자하여 이따금씩 자신들의 뒷주머니로 빠져나갔으리라 짐작된다. 정조(正祖) 11년 7월에 울산 어부 등 14명이 울릉도에 잠입하여 발생한 생복을 잡다가 삼척의 포구에서 사로잡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은 좌병영에서 발생한 생복잡이 공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일로 원춘도(原春道·지금의 강원도) 감사와 비변사(備邊司)의 규탄을 받아 좌병사와 울산도호부가 파직되었을 정도였다.
세상에 전해오기를 조정에서 생복을 잡기 위하여 제주도(濟州道)의 어민 몇 명을 울산에 데려왔는데, 그 후로 그 자손들이 성황당(城隍堂·지금의 내황)에 살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의 머리카락이 모두 붉어 이곳 사람들은 기이한 일로 여겼다. 비록 성품이 강직하고 남을 속이는 일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붉은 색의 머리카락이 싫어 그들을 두모오(頭毛惡)라 불렀다고 한다.

● 용암
   무룡산(舞龍山)은 울산의 진산(鎭山)이었으며 비를 빌어 무우제(舞雩祭)를 지냈던 곳이다.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이 산의 신은 용신이다. 무룡산 서쪽 벼랑의 어느 시냇가에 깊은 굴이 있었는데, 그 속에서 용이 나왔다고 한다. 용이 나타났다는 그 굴속에는 박쥐가 많아 천정 곳곳에 붙어 있었다. 굴 밑에는 맑은 석담(石潭)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넘친 못물이 호계(虎溪)의 북쪽에서 흘러나오는 시내와 만난 내맥이천(松亭川)을 이뤄 동천(東川)으로 흘러간다. 세상 사람들은 용이 나왔다는 굴을 용암(龍岩)이라 하였으며 굴 밑의 석담(石潭)을 용당, 그 골짜기를 용당골이라 불렀다.

● 옥천암
   옥천암은 무룡산 남쪽 기슭에 오봉(五蜂)이 흘러내린 명당영지에 자리 잡고 있다. 본래는 오봉(五蜂)의 이름을 따서 오봉사라고 하다가 지금은 옥천암이라고 불려진다.
오봉사를 옥천암이라고 명칭을 바꾼 까닭은 이곳에 영남 제일의 수질을 자랑하는 심층 석간수가 철철 넘쳐 흐르기 때문이다. 옥천이란 구슬 옥(玉)자와 샘 천(泉)자로 마치 구슬과 같은 샘물이 흘러 넘치는 우물이란 뜻이다.
옥천암은 무룡영산의 정기가 맺힌 명당으로써 옛날 어떤 사람이 자기 부친의 시신을 몰래 암장해 놓고는 이 사실을 끝내 은폐하여야 하는데 취중에 그만 그 사실을 폭로하고 말았다. 다시 그곳을 파헤쳐보니 시신이 누런 황금색으로 변하고 비늘이 돋쳐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당사리 용동굴
   북구 강동동 당사리 입구에는 마치 해금강 한 조각을 떼어다 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다. 억만년의 역사 속에 동해의 거센 풍랑에 시달린 앙상한 바위들이 우뚝 솟아 있고, 하dis 물거품이 수를 놓는 파도는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절경을 이룬다. 여기에는 유난히 우림하고 높은 두 개의 바위산이 나란히 솟아 있는데, 그 가운데 용동굴(龍洞窟)이 있다. 동굴은 길이가 약 5m, 높이 약 2m로 약 십여 명이 은신할 수 있을 정도이다. 바위산은 원래 하나로 붙어있었는데, 동굴에 살고 있던 용이 하늘로 승천할 때 천지를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둘로 갈라졌다고 한다. 이웃 금천 마을에서 당사리로 들어가려면 이 용동굴이 있는 산 잘룩이를 넘어야 한다. 이 잘룩이를 가리켜서 속칭 ‘벌레목’이라 한다. 벌레목은 어휘가 변천한 것인데, 본래는 ‘벌목’이다. 용이 하늘로 승천할 때 꼬리를 휘둘러 쳐버린 잘룩인데 ‘벌’이란 칠 벌(伐)자로 쳐버린 목이란 뜻이다. 지금은 이 두 바위산에 해송들이 우거져 있는데, 주말이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아름다운 경관을 음미하며 해수욕을 즐긴다.

● 모곡동 리어(母童谷 鯉漁)
   북구 어물리 물청칭 골짝 남쪽으로 뚫린 목동골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이곳에는 홀어머니와 둘이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도 효성이 남달랐던 길동(吉童)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건너편 산기슭에서 홀로 지내던 중년의 나병 환자가 고기가 많은 곳이 있다는 거짓말로 길동을 깊은 산 속으로 유인했다. 중년의 환자는 길동의 입과 손발을 묶은 뒤, “용서해라! 사람의 간을 부풀게 해서 꺼내 먹으면 나병이 낫는다”며 온몸을 간질이기 시작했다. 어두워져도 돌아오지 않는 아들이 걱정돼 길을 나선 길동의 엄마는 한참을 찾아다닌 끝에 멀리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를 들었다. 불길한 예감에 서둘러 뛰어간 엄마는 어이없는 장면에 기겁을 하고 말았다. 길동의 엄마를 본 나병 환자는 무릎을 꿇고 “죄 많은 놈이 살겠다고 착한 길동이를 해치려 했다”며 사죄했다. 길동의 엄마는 결코 용서할 수 없었지만 아들의 간곡한 만류로 불문에 붙이기로 했다. 그 후로 셋은 더 없이 친하게 지내며, 양식이나 좋은 약재 등을 주고받았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길동이네 마당에 무지개가 내려앉더니 커다란 잉어 한 마리가 떨어졌다. 길동이는 잉어를 바구니에 담고 한달음에 달려가 “아저씨! 마당에 잉어가 떨어졌는데, 나병에 효능이 있을 거예요”하며 기뻐했다. 길동이의 마음 씀씀이에 감복하여 잉어를 먹은 뒤 열흘쯤 지나자 거짓말처럼 환자의 병이 나았다. 어떻게든 은혜를 갚고 싶었지만, 그 동안 자신의 병을 치료하느라 가산을 탕진한 나병 환자는 약초를 내다 팔아 돈을 모으기로 결심하고 산으로 올라갔다. 도라지, 더덕 등 이것저것 캐고 있던 나병 환자의 눈에 산삼 무더기가 보였다. 백년 묵은 산삼 서른 뿌리였다. 다음날 산삼 서른 뿌리를 판 돈 전액을 길동이네에 전한 나병 환자는 도망간 아내를 찾아 정처 없이 떠나갔다. 결국 마음씨 착한 길동이는 하늘도 감동하여 오래도록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한다.

Posted by 울산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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