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울주군과 경남 밀양시, 경북 청도군에 걸쳐 있는 가지산(1,240m)은 해발 1,000m 이상의 7개 고산으로 이루어진 영남의 알프스 중 울산 산악의 주봉이다. 백두대간의 여맥이 힘껏 솟구쳐 형성한 영남 알프스는 가지산을 비롯해 취서산(1,092m), 신불산(1,209m), 천황산(1,189m), 운문산(1,188m), 고헌산(1,033m), 문복산(1,013m)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균형 잡힌 산세와 웅장함을 자랑하는 가지산은 계절마다 독특한 자태를 뽐낸다. 가지산 입구에는 비구니의 수련도량으로 유명한 석남사가 자리 잡고 있으며, 운문산으로 이어지는 산등성이에는 기암괴석과 억새밭이 어우러져 산행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가지산의 또 다른 묘미는 이야기를 간직한 바위 봉우리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베틀 같은 베틀바위, 딴청을 부리고 있는 딴바위, 탐욕의 어리석음을 꾸짖고 있는 전설의 쌀바위 등이 있다. 쌀바위는 전국의 암벽 등반가들이 한번쯤 들리는 암벽 코스로도 유명하다. 가지산 아래에는 석남골과 청수골이 있는데, 밀양고개에서 석남사를 향해 동쪽으로 전개되는 석남골은 말 그대로 심산유곡이다. 흰반석, 연못, 작은 폭포들이 줄지어 있으며, 이 물줄기는 태화강의 시류가 된다. 가지산 자락에 있는 통나무집이나 가든 등지에서 산채비빔밥, 버섯, 언양 한우불고기등 전통 음식을 맛본 뒤, 탄산유황온천과 휴양림에서 여행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내는 것도 잊지 못 할 추억이 될 것이다.

봄(SPRING)


   가지산의 봄은 사계의 묘미를 모두 경험할 수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등산로 주변에 지천으로 피어 있는 개나리와 진달래, 철쭉 등이 봄의 향기를 선사하고, 산 중턱을 오르다 보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여름으로 초대한다. 정상 부근에는 아직도 발목까지 눈이 쌓인 겨울이 펼쳐져 있고, 동료들과 얘기꽃을 나누며 내려가는 등산로에는 낙엽을 밟는 듯한 가을 정취가 묻어난다.

여름(SUMMER)


   등산로를 따라 드러나는 얕고 넓은 계곡! 싱그러운 소나무 향으로 둘러싸여 공기부터 다르다. 가지산 곳곳에 숨어있는 계곡속의 비경은 약간 어두울 정도로 울창한 숲을 이룬다. 그 속에 작은 소와 폭포가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맑고 투명한 물의 세계가 펼쳐진다. 한나절 시원한 물놀이를 하기에 안성맞춤인 계곡 속으로 여름 최고의 피서를 떠나보자

가을(AUTUMN)


   오색의 화려함이 가득해 신이 빚은 색채의 마술이라 불리는 단풍!  모진 생명력과 함께 스산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은빛 전령사 억새!  가지산의 가을은 단풍과 억새의 물결이 가득하다. 파란 하늘 아래 붉게 물든 가을 가지산의 유혹을 음미해 보자. 못 이기는 척 정상으로 발걸음을 옮겨 놓으면 억새가 연주하는 가을 교향곡이 은은한 즐거움을 들려준다.

겨울(WINTER)


   첫눈은 설램이다. 그래서일까? 가지산은 겨울 내내 머리에 첫눈을 이고 산다. 눈 내린 겨울, 순백의 발자국을 새기며 풍경 소리 그윽한 석남사 계곡을 따라 겨울 산행에 나서는 재미도 쏠쏠하다. 다른 곳에서는 쉽게 접하기 힘든 설경을 감상하면서 트래킹을 즐길 수 있다. 하얀 눈꽃의 낭만 위로 가지산의 겨울은 소복소복 쌓여 간다.

설화/전설

▶ 가지산의 유래
  『해동고승전』이나 『삼국유사』등의 문헌이나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구전되어 오는 내용을 간추려 보면 가지산의 옛 이름 새산(鳥山) 혹은 까치산이었다고 한다. 가지산(加智山)이라는 지명은 까치에서 나왔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가(加)는 까의 음차(音借)이며 지(智)는 치로 읽어야 하니 역시 치의 음차(音借)인 것이다.
그래서 가지산(加智山)은 옛「가치메」의 이두(吏讀)로 된 이름이다. 까치의 옛말은 「가치」였다. 울주군 상북면 주민들은 가지산을 가리켜 ‘구름재’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자주 구름에 뒤엎이는데서 유래했다. 또 천화산(天火山)이라고하는 연유는 이 산이 화산의 분화구 지대임을 말해주는 듯싶다.
그리고 밀양 쪽에서는 실혜산(實惠山)이라고 하는데 산 속에 실혜촌 또는 부요(富饒)마을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실혜촌은 일제 시대 이후 없어졌다고 한다.

▶  가슬갑사
   화랑 출신인 귀산과 추항은 친한 친구 사이로 진평왕 22년(600)에 원광법사가 머물고 있는 가실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법사가 말하길「세속오계가 있으니 임금 섬기기를 충으로써 하고(事君以忠), 어버이 섬기기를 효로써 하고(事親以孝), 친구 사귀기를 신으로써 하고(交友以信), 전쟁에 임하여 물러서지 않고(臨戰無退), 생명 있는 것을 죽이되 가려서 한다(殺生有擇)는 것이다. 너희들은 실행에 옮겨 소홀히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 백제와의 아막성 전투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귀산은 큰소리로 외치기를「내가 스승에게 들으니 선비는 전쟁에 있어 물러서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찌 감히 달아날까 보냐」하고 적에게 돌진하여 적군 수십 인을 격살하고 신라군을 승리로 이끌게 하였으며, 추항과 함께 전사하여 세속오계를 몸소 실천했다.
   귀산과 추항이 원광법사로부터 세속오계를 받았다는 가실사(加悉寺)가 지금까지 청도(淸道) 땅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근래에 와서 그 절이 상북면(上北面)에 있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원광서학(圓光西學)편을 보면 가실사(加悉寺)를 가슬갑(加瑟岬)이라 하였으며 이 절을 설명하여「혹은 가서(加西) 또는 가서(嘉西)라 하니 모두 방언이다. 갑(岬)은 속언고시(古尸-곳)라 하므로 혹은 고시사(古尸寺)라 하니 마치 갑사(岬寺)라고 하는 것과 같다. 지금 운문사(雲門寺) 동쪽 9천보(步) 가량 되는 곳에 가서현(加西峴)이 있는데 혹 가슬현(嘉瑟峴)이라고 한다. 현의 북동(北洞)에 절터가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라 하였다.
   또 읍지(邑誌)를 살펴보면 운문산(雲門山)을 일명 가슬현(嘉瑟峴)이라 하였고 가슬갑사(嘉瑟岬寺)를 가슬현에 있다가 없어졌다고 하였다. 이를 볼 때 가슬갑사(嘉瑟岬寺)는 운문재의 상북(上北) 쪽 땅에 있었음을 말함이니 유서 깊은 절이라 할 것이다.
   덕현리(德峴里) 삼현( 峴)마을은 그 훈(訓)이「곶재」로써「곳 - 古尸」이 바로 그것이다.

▶  소야풍년 
    상북면 소호리(上北面 蘇湖里)의 옛 이름을 소야(所也)라 하였다. 원래 두서면에 속했던 소야(所也)와 경주시 내남면의 동골을 합쳐서 흔히 소야동골이라 하였으며 이것이 줄어 쇄동골이라고도 부른다. 들마을(野村)에 살던 어떤 사람이 소야를 찾아 첫길을 나섰다. 가지산 아래에 있는 삽재라는 마을을 지나 북쪽으로 넘어가는 그길은 10리가 넘는 험한 산길이었다. 외롭고 또한 불안한 산길이었다. 길은 마침내 광바위(廣岩)에 이르렀으나 바위틈을 넘어 다녀야 하는 좁은 길이었다. 길손이 문득 앞을 보니 지게를 진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얼떨결에 길손의 입에서는「당신 어딨소?」하는 말이 터져 나왔다. 이때 그 사나이는 바위 위로 길을 비키면서 의기양양하게「쇄동골 사오」하며 답하였다. 길손이「어데를 가는 길이오?」라고 매우 정중하게 묻자 사나이는「신나락 구하러 가는 길이오」하는 것이었다. 길손은 지난해의 농사가 고랭지에서는 풍작을 이루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므로 다시 말을 이어「신나락은 무슨 신나락이오?」하니, 사나이가 하는 말이「나락 등이 터져 못쓰게 되었소」라며 길을 비켜 가버렸다.
   이 대화에서 나타나는 것 가운데 나락이 등이 터져 못쓰게 되었다는 말에는 함축성이 있는 하나의 풍자가 섞여 있다. 소호리나 동골처럼 높은 산에 둘러싸여 일조시간이 짧고 찬물이 새어드는 곳에는 가뭄이 와야 풍작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심한 가뭄 때는 벼알의 등숙이 좋아서 벼 껍질이 터지도록 벼농사가 잘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7월 장마가 계속되거나 비가 많은 해는 그만 미발(未發·피지 않음)에 그쳐 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 소호리의 사정인 것이다.

▶  쌀바위
   가지산 정상 인근에는 쌀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다. 옛날 이 바위 밑에 초막을 짓고 수도 정진하던 한 스님이 있었다. 양식이 떨어지면 아랫마을로 내려가 탁발(동냥)을 얻어야 하는 스님의 고행이 가여웠는지 부처님이 기적 같은 자비를 내렸다. 그 바위에서 날마다 한사람이 먹을 수 있는 쌀이 물방울 흐르듯 또닥또닥 나왔던 것이다. 스님은 수없이 부처님께 감사의 염불을 올린 다음이 쌀을 소중히 거두었다.
   그러나 욕심이 생긴 스님에게 바위 구멍은 작아 보였다. 구멍을 크게 하면 쌀이 더 많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바위 구멍을 크게 뚫기 시작했다. 쌀을 팔아 돈이 모이면 큰 절을 지어 주지로 출세할 날도 멀지 않았다는 환상에 사로잡힌 스님은 그날로 수도 정진은 뒷전이었다. 그러나 쌀이 나와야 할 바위 구멍에서는 쉴 새 없이 맑은 물만 흘러나왔다. 스님은 그때서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뉘우치며 통곡했으나 허사였다. 그 후로 쌀은 영영 나오지 않았으며 이름만이 쌀바위, 미암(米岩)으로 전해온다. 지금도 그 스님이 쌀을 받았다는 곳에 가 보면 바위틈에서 물이 졸졸 흘러내리고 있다. 능선에서 목을 축이는 유일한 장소 쌀바위에는 인간의 탐욕을 거부하는 자연의 섭리가 함께 흐른다.

Posted by 울산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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