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울산의 독립운동에 대해 잘 알고 계신가요?

 울산에서도 일제강점기 시절 수많은 독립 의사와 투사들이 대한민국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하셨답니다. 그 분들의 노력과 울산에 고스란히 베여 있는 곳들이 있습니다. 근현대사의 유적지로 남은 이 곳들은 울산 시민일수록 더욱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겠죠? 그런 의미에서 울산박물관에서는 이번 3월에 2차례의 역사탐방을 가졌습니다. '울산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번 근현대사의 유적지 탐방!! 울산누리도 다녀왔는데요. 과연 어떤 곳들을 가서 무엇을 보고, 배웠는지 지금부터 여러분께 들려 드리겠습니다!

 역사탐방 총 2차례 1회는 3월 19일, 2회는 3월 26일에 진행되었답니다.

 3월 26일 오전 8시 50분            

 사실 월요일은 울산박물관 휴관이랍니다. 알고 계셨죠?^^ 그렇지만 울산역사탐방을 위해 이른 아침부터 울산박물관을 찾았습니다. 

 울산박물관 안내데스크에 계신 학예사님께서 나눠주신 울산박물관 소식지와 울산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 자료집, 탐방증을 가지고 차량으로 이동!

 

 역사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그런지 더욱 들뜬 분위기로 시작된 역사탐방이었습니다. 그럼 출발~!

 

오전 9시 30분                      

첫번째 탐방지는 박상진의사 생가

 

 가장 먼저 도착한 탐방지는 울산 북구 송정동에 위치한 박상진 의사의 생가입니다.

 

 안내에 따라 내부로 들어가서 잠깐 자리에 앉아 설명을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보는 것은 그냥 보는 것보다 훨씬 더 기억에 남는 법이니까요.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신 분은 '전성현 선생님' 자료집 내용을 집필하신 분으로,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에서 연구원으로 계시다고 합니다. 훈남이시죠? ^^

 울산지역은 전통적인 행정중심지이며 조선인 거주지인 언양, 병영, 남창을 중심으로 3.1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이 영향으로 전통 유림세력과 새롭게 성장한 민족 및 사회운동가들을 중심으로 군자금 모집과 각종 사회 단체 및 신간회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였죠.

그리고 이 집은 독립운동가 고헌 박상진 의사가 살았던 집입니다.

박상진의사는 1902년 허위 선생에게 한학을 배운 후 양정의숙에 진학하여 법률과 경제를 전공했습니다.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에 발령되었으나 스스로 사퇴합니다.

그 후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 결성에 앞장서기 시작했죠.

 박상진의사는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력으로 독립을 달성할 목적으로 대한광복회 총사령을 맡아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21년 38세의 젊은 나이로 대구 형무소에서 처형되었습니다.

1963년 정부는 국권회복과 항일투쟁에 앞장선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설명이 모두 끝나고, 탐방 인증샷을 한 장 남기고 박상진의사의 생가를 둘러보았습니다.

  

 이 집은 행랑채, 사랑채, 안채 등 모두 4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기와집입니다. 전체적으로 ''자형 구조를 가진 조선 후기 양반 살림집입니다.

 

내부에는 박상진 의사 생가 전시관이 있어 박상진 의사에 관련된 독립운동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매직비젼으로 만들어진 박상진의사의 생애

 

▲ 일제치하 우편마차 세금 탈취 사건 모형

 1915 12 24일 일어난 사건.
 경주 광명리 노상에서 경주, 영덕, 영일군에서 일제가 징수한 세금을 운반하던 우편마차에서 박상진 의사의 지령을 받은 우재룡, 권양만이 8,700원을 탈취하여 군자금으로 확보한 사건입니다.

 

오전 10시 40분               

두번째 탐방지는 방어진 일본인사회와 일본인가옥이었습니다.

 

 

 두번째로 도착한 탐방지는 동구 방어동에 위치한 일본인 가옥입니다. 모르고 지나친다면 오래된 건물이라고 지나칠 수도 있지만 자세히 보면 일본의 정통 건축방식대로 만들어진 일본인 가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이 직접 거주했던 곳으로, 이 골목에 있는 집들이 그때 그 시절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전성현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일본인 가옥들을 살필 수 있었습니다.

 

 현재 1층은 이곳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2층은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가옥들이 많이 아있진 않지만 지금까지 남아있는 이곳의 가옥들을 보면서 그 시절의 역사를 되짚어 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가옥이 있는 골목에서 조금만 걸어서 이동하면 방어진항을 볼 수 있습니다.

 방어진은 조선 후기 울산도호부 관할 하의 16개면 가운데 동면 내의 방어진리였습니다. 1895년 방어동과 화잠동으로 분리되었고, 1914년 일제의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방어리로 합쳐졌습니다.

 한일병합을 전후로 조성된 일본인 이주어촌인 방어진은 일본인 중심의 사회구조를 갖추기 시작했고 동해안의 어업전진기지로 성장하여 어항도시로 발달하였습니다. .

 

 방어진에 일본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897년, 오카야마현히나세무라의 어민 40여명이 방어진 근해에 삼치어업을 목적으로 출어했다가 삼치유망이 조류에 의해 떠내려가자, 잠시 대피하기 위해 방어진에 내항한 것이 시작이라고 합니다. 그 후 방어진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내항한 일본인 어업자는 약 1,800여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인 내항자가 증가하자 1905년부터 통어업에 필요한 각종 생활필수품과 같은 물자를 제공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했고, 1909년 자연적 이주어촌에 후쿠오카, 오카야마, 가가와현으로부터 온 보조 이주어촌까지 합해져 1910년에는 120호로 증가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후 1930년대 초반까지 활발한 조업과 함께 대표적인 어항도시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1930년대 말부터는 정어리를 비롯한 어업의 심각한 불황과 중일전쟁 이후 강화된 전시 통제경제(어선 징발 등)로 말미암아 방어진 일본인유지의 일본, 부산 등으로의 이전이 속출하면서 1940년대 결정적으로 쇠락해졌다고 합니다.

 

 

 방어진항은 울산만의 방파제 구실을 하고 있으며, 현재는 울산 시민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그 시절의 역사를 모두 담아내고 있는 방어진은 그 어떤 바다의 모습보다 깊고, 짙은 바다색을 띄고 있었습니다.

  다음 목적지는 방어진에서 멀지 않은 보성학교터와 성세빈 송덕비입니다. 울산누리의 다음 탐방 포스팅을 기대해주세요!!

 

 

 

Posted by 울산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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