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 129도 21분 50초, 북위 35도 21분 20초에 위치한 간절곶은 새천년 밀레니엄의 첫 해돋이(2000년 1월 1일 오전 7시 31분 17초)로 유명한 곳이다. 먼 바다에서 바라보면 뾰족하고 긴 간짓대(대나무 장대)처럼 보여 이름 붙여진 간절곶은 포항의 호미곶보다 1분, 강릉의 정동진보다는 5분 앞서 일출의 장관을 볼 수 있다. 하얀 포말이 물결치는 바다 위로 붉은 해가 솟아오르고, 두 손 모아 간절히 기원하면 모두 다 이루어질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간절곶이 주는 최고의 선물임에 틀림없다. 이 곳에는 새천년 기념비와 함께 조각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평소에도 부산, 경주 등 인근 지역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간절곶 언덕배기 위에는 17m 높이의 등대가 있다. 예전에 사용하던 등탑(등대 상단부)을 지상에 내려놓아 관람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등대에서 하룻밤 묵을 수 있는 특별한 이벤트도 마련되어 있다. 또, 밀레니엄 전시실에는 등대와 관련한 자료들과 울산항을 소개하는 시설을 갖추어 놓아 흥미로움을 더한다. 등대 전망대에 올라서면 시원하게 펼쳐진 동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투명한 쪽빛 바다에서 눈길을 돌려 북쪽으로 4km 정도 거슬러 가면 길이 1km, 폭 30m 정도의 아담한 진하해수욕장이 있다. 자그마한 섬 명선도와 하얀 모래사장, 얕은 수심, 그리고 물살을 헤치는 윈드서핑이 어우러져 아름다움 풍광을 보여준다. 한 폭의 수채화처럼 낭만적인 해안 절경을 따라 간절곶 남쪽으로 여정을 잡으면, 신리, 서생, 나사 등 자그마한 항구와 방파제가 늘어 서 있는 바닷가 마을을 만날 수 있다. 등대가 있는 바닷가를 찾아 한껏 멋스러운 여행을 하고, 그 속에서 잠시 시인도 되고 화가도 되어 나를 새롭게 꾸밀 수 있는 곳, ‘때로는 주목받고 싶은 삶을 꿈꾼다면 동북 아시아 대륙의 첫 아침이 시작되는 간절곶으로 떠나자.

 


설화/전설

● 꿀다리
   서생면 화정리(禾亭里) 앞을 흐르는 회야강(回夜江)을 일승강(一勝江)이라 부른다.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서 조·명 연합군이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제 1차 도산성(島山城·지금의 학성) 싸움에서 조·명의 연합군은 계속되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성의 함락에 실패하고, 오히려 경주로 퇴각해야 했다. 경주로 물러선 조·명연합군의 군사들은 대부분 새로운 전투에 차출되고, 패전의 치욕을 씻기 위해 장수들은 묘책을 강구했다. 서생포 왜성(西生浦 倭城)을 공격해 적의 허를 찌르자는 의견에 따라 명나라의 장수 오유충(吳惟忠)과 조승훈(祖承訓)은 결사대 20인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물론 지리에 밝은 울산의 군사 몇 명이 길을 인도하였을 것이다.
   이들 결사대들은 심야에 서생포로 잠입하여 회야강에 있는 조교에서 적을 만났다. 이 때 명장 이춘방(李春蒡)이 급히 다리를 끊어 왜병을 수장시키고, 살아남은 왜병 백여급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또 여기에 놓여 있었던 다리를 ‘통시다리’라 하여 돌을 둥글게 무더기로 쌓아올리고, 그 위로 나무를 놓아 사람들이 건넜다고 한다. 이 다리에 손을 대면 전쟁이 일어나지만 승리한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돌에 굴(石花)이 많이 붙어 자라기 때문에 어느새 다리 이름도 ‘꿀다리’로 변하였는데, 꿀은 굴의 방언이다.

● 앙금할망구 반지터

   서생포 왜성이 자리 잡은 실성산(甑城山)의 산신을 [앙금할망구(老姑)]라 한다. 아득한 옛날부터 하늘과 땅 사이의 가장 가까운 곳, 하늘의 신이 땅으로 내려와 첫발을 내딛는 곳이 산정상이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산의 신령을 믿으며 가호를 받았고, 식량 등 삶의 풍요를 빌었다. 실성산의 앙금할망구도 이런 류의 산신인데, 우리나라 남부지방에는 유독 여신(女神)의 존재가 두드러진다. 지리산의 천왕봉성모(天王峰聖母)를 비롯하여 선도산(仙桃山)의 서술성모(西述聖母), 영일(迎日)의 운제산성모(雲梯山聖母)가 있는가 하면 울산지방에서도 치술령의 치술신모, 두서면 아미산(峨嵋山)의 할망구(老姑)등이 그것이다. 실성산의 앙금할망구에게는 소중히 간직해온 반지(半指)가 있었다. 남극에서 돌아오던 고래들로부터 선물 받은 산호반지였다. 하루는 앙금할망구가 서생성의 대장단(大將壇)에 올라가 동해의 파도와 어울려 지나가는 뱃길을 보살피고 있는데, 그만 옆에 빼두었던 반지가 사라져 버렸다. 돌 틈에서 나타난 쥐 한 마리가 이상한 것을 보고 물고 가버렸던 것이다. 화가 치밀어 오른 앙금할망구가 땅바닥을 헤집는 등 야단법석을 떨었으나 끝내 반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대장단(大將壇)에는 얼마 전까지도 땅을 파헤친 다섯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전해온다.

● 이덕도

   서생면 진하리(西生面 鎭下里)의 바다에 이덕도(二德島)라는 수중암이 있다. 일명 덕도(德島)라고도 하는 것으로 명선도(名仙島)의 바로 남쪽에 있다. 이덕도에 얽힌 비화는 신라 천년의 영광을 오래 누리지 못하고 나라를 들어 고려(高麗)에 항복하였던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와 관련되어 있다. 비록 항복이라는 오명이 뒤따랐지만, 경순왕은 고려로부터 두터운 예우를 받아 일신에 불편함이 없었다. 그러나 한 나라의 임금이었던 그가 어찌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 죽어 용이 된 경순왕은 여의주를 입에 물고 하늘로 올라가던 중 인간 세상을 저주하듯 몸을 틀어 꼬리를 후리 쳤다. 이때 동해에 있던 많은 섬이 침몰하고 서생에 있던 명선도가 반쪽이 나서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이덕도(二德島) 역시 저주의 희생물이 되어 섬은 작은 바위 두 개로 변하여 파도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울산의 바다에는 용과 관련된 설화가 많은 편이다. 신라의 문무왕비(文武王妃)가 죽어 용이 되어 수중으로 잠기니 그 바위를 댕바위(大王巖)라 전해오며, 처용(處容)이 출현하였다는 처용암(溶巖巖)을 일명 대용암(大龍巖)이라 하고, 방어진(方魚津) 등대산의 북쪽 벼랑에는 청룡이 살았다는 용굴이 있다.

● 효열리

   효암강(孝岩江) 어귀에 남북으로 자리 잡은 마을을 19세기 말에는 효열리(孝烈里)라 부르다가 일제가 이 땅을 강점하고 난 뒤부터 북쪽은 신암리(新岩里)로 편입됐다. 서생면사무소가 있는 신암(新岩)의 남쪽에 있는 이 아담한 마을을 효열(孝烈)이라 부르게 된 데에는 한 맺힌 사연이 있다. 여느 바닷가 마을의 평범한 가정처럼 먼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간 남편을 기다리며 해초를 뜯곤 했던 아내가 있었다. 그런데, 평소와 다름없이 배를 띄워 고기잡이를 나갔던 남편이 해가 저물어도 돌아오질 않았다. 아내는 매일 수평선을 바라보며 남편을 기다렸지만, 간절한기다림은 한낱 물거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바다에서 돌풍을 만나 배는 뒤집히고, 남편은 동해의 수중고혼이 되었다. 아내는 뭍으로 밀려온 배를 부둥켜안고 통곡하다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정신을 차린 뒤에도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이어졌다. ‘내 남편의 살을 뜯어먹고 피를 빨아먹었던 생선을 어찌 입에 댈 수 있으랴’ 하며 아내와 어린 자녀들은 그 후로 바다에서 나는 것을 일체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 가정의 곧은 마음을 주민 모두가 칭송했으며, 마을 이름도 어느새 효열(孝烈)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곧고 예쁜 마음씨들이 읍지(邑誌)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 이름은 전하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

● 의논암

   온산읍 우봉리의 우봉항(牛峰港)에는 의논암(議論岩)이란 바위가 있는데, 두꺼비같이 생긴 두 바위가 서로 마주보고 있어 마치 정답게 의논하는 것 같은 형상이다. 그래서 두꺼비바위, 혹은 의논암이라 이름 붙여졌다. 이 두 마리의 두꺼비는 본래 제주도에서 살았는데, 좁은 섬 생활에 실증을 느낀 나머지 서로 의논한 끝에, “우리보다도 훨씬 작은 멸구들도 바람을 타고 중국 대륙에서 날아오는데, 우리들인들 육당으로 못하랴?”며 육지로 건너가자고 의기투합했다. 때마침 태풍이 닥쳐왔고, 두 두꺼비는 마침내 몸을 솟구쳐 바람을 탔다. 이윽고 육지가 보였다. “우리가 동경하던 육지가 바로 여기로구나” 하며 내려앉았다. 사방을 보니 다 낯선 곳이었으므로 두 두꺼비는 마주보고 앉았다. 사람들은 바람에 날아온 의논암을 신령스럽게 생각했다. 언제부터인가 의논암에 가서 소원을 성취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풍습이 생겨났다. 게다가 한 쌍의 두꺼비가 꿈틀거리면 바람재비가 생겨났다고도 전해진다.

Posted by 울산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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